‘취미부자’ 물리학자가 전하는 ‘이토록 아름다운 원리’ [책&생각]

한겨레 2024. 9. 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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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를 찾아서 l 박병철 번역가
120권 옮긴 국내 원톱 물리 번역가
박병철 번역가는 기타부터 당구, 피아노, 레고, 프라모델 등 다양한 취미를 수준급으로 가진 ‘취미 부자’다. 그가 자택의 레고를 만드는 방에서 사진 포즈를 잡고 있다.

날짜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69년 7월20일(미국 현지 기준).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날이었다. 정부는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학교에 안 가도 되니 마냥 신났던 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마당에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할 때, 아버지는 어디선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와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로켓의 발사부터 분리, 궤도 진입, 도착까지의 과정을 그림을 그려가며 아이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아버지 옆에 앉아 열심히 듣던 아이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내팽개치고 모두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어떤 인생은 하나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또 어떤 인생의 과업은 하나의 장면으로 다 설명된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던 아이는 자라서 연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핵물리학으로 석사를 밟은 뒤 카이스트에서 이론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30년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금까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초공간’ ‘미래의 물리학’ ‘프린키피아’ ‘시간의 기원’ 등 물리학을 중심으로 12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박병철 번역가의 첫 번역작은 1996년 출간된 ‘스타트렉의 물리학’이다. 영화 ‘스타트렉’의 장면들이 물리학적으로 가능한지 풀어내는 책이었는데, 번역이 호평을 받으면서 번역 의뢰가 계속 이어졌다. 가독성이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에 빗대면, 번역은 ‘국8영2’ 또는 ‘국9영1’입니다. 영어 실력보다 국어 실력이죠. 내용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원문을 가공해 우리말로 다시 쓰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가 문장에 들이는 노력은 가히 원석을 가공해 보석으로 만드는 세공사 수준이다. 영어의 주어는 대체로 ‘나’이지만 한국어가 ‘나’로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우리말에 맞게 주어도 바꾸고 문장 배열도 바꾼다. 또 한국어 문장은 대개 ‘∼다’라고 끝나는데, 모든 문장이 ‘∼다’라고 끝나면 지루하기 때문에, 문장을 대화체, 의문문 등으로 다양하게 변용하고 유행어와 유머, 사자성어 등도 동원해 이해도를 높인다.

그 결과, 독자들로부터 ‘책 저자와 대화하는 기분이다’ ‘박병철 번역가 이름만으로 책을 고른다’ ‘문학 번역 수준의 탁월한 필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판계는 ‘어떤 책들은 박병철 번역가가 번역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한국에선 맡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원톱의 실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2005년에 ‘우주의 구조’ 번역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2016년엔 ‘마음의 미래’ 번역으로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을 수상한 배경이다.

“학창시절에 엉망인 번역본 때문에 이해가 안 가서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그때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공부했다면 시간을 얼마나 절약했을까 싶죠. 모국어로 공부하는 영어권 학생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합니다.” 그가 번역에 진심인 이유다.

박병철 번역가가 집의 거실에 마련돼 있는 당구대에서 당구를 치고 있다.

7년 전부터는 강단에서 은퇴하고 번역과 저술에만 전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0권짜리 ‘나의 첫 과학책’ 시리즈(휴먼어린이) 등을 펴내는 등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집필 활동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건 따로 있다. 일단 눈을 뜨면 당구나 기타를 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맑아진 영혼으로 번역에 집중한 뒤에는 프라모델과 레고 등을 만들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집의 거실에는 당구대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고, 레고와 프라모델을 만드는 작업방도 따로 있다. 당구는 프로 데뷔가 가능한 실력이고, 기타는 통기타부터 클래식 기타, 일렉트릭 기타까지 수준급이다.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수백점의 레고와 프라모델 작품들은 입을 다물 수 없는 규모다. 그야말로 취미 부자를 위한 ‘무릉도원’이다.

한때 목수로도 일했던 아버지의 손재주를 ‘살짝’ 물려받았단다. 번역을 이야기할 때는 노장의 물리학자였지만, 취미를 이야기하자 10대 소년의 눈빛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리학의 매력을 물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찮은 지식인데, 궁금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값진 지식을 알려주는 학문이죠.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는 물리학과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는 물리학의 간극은 너무 큽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대해 수학적으로 명료하고 깔끔하게 설명해주는, 너무나 아름다운 학문입니다.” 그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아주 오래도록 설명했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300년 넘게 증명이 안 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영국 수학자 앤드루 와일즈가 7년간 칩거하면서 증명해낸 이야기다. 박 번역가는 “수학책은 안 팔린다며 거절하는 출판사를 설득해서 겨우 출간했는데 지금은 수학·과학도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고 뿌듯해했다.

사이먼 싱 l 영림카디널(1998)

엘러건트 유니버스

끈이론의 선두주자가 끈이론의 기본 개념과 탁월한 설명력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전한다. 이론물리학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하나의 법칙으로 통일하려는 학문인데, 끈이론도 그중 하나다. 특히 박 번역가의 박사논문이 끈이론이었기에, 이 책의 번역은 더욱 뛰어나다.

브라이언 그린 l 승산(2002)

평행우주

우주론의 역사부터 첨단 우주론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일본계 미국 물리학자인 미치오 카쿠의 대표작이다. “카쿠의 간결한 문장과 뚜렷한 논지를 좋아한다”는 박 번역가는 국내에 들어온 카쿠 책 대부분을 번역했는데, 이 책은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다.

미치오 카쿠 l 김영사(2006)

신의 입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언 레더먼이 전하는 입자물리학의 역사와 물리학자들의 마지막 과제인 힉스입자의 존재와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다룬다. “현장에서 뛰는 실험물리학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유쾌한 입담과 유머감각으로 보여준다.”

리언 레더먼 등 l 휴머니스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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