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긍정하고 수용하라, 그것도 폭력이다

최재봉 기자 2024. 9. 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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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유형별 폭력 개념 정리한 연구서
픽사베이

폭력 개념 연구
열 가지 사나운 힘의 해부
서보혁, 이성용, 허지영 엮음 l 모시는사람들 l 2만원

폭력은 물리적 힘이나 수단을 통해 나의 뜻을 타인에게 강제하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뜻한다. 개인끼리의 주먹다짐에서 국가 간 전쟁까지, 몸을 상하게 하고 나아가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노골적 폭력에서부터 언어폭력이나 교묘한 감정 폭력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양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남북 사이의 분단과 대치 속에서 불안감을 안고 사는 한반도의 민중은 특히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의 본질과 작동 방식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 10명이 함께 쓴 ‘폭력 개념 연구’는 폭력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 평화를 향한 모색에 도움이 될 법한 책이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에서는 국가 폭력, 종교 폭력, 젠더 폭력, 공동체 폭력처럼 전통적이고 오래된 유형의 폭력을 다루고 제2부는 생태 폭력, 인도주의 폭력, 일상적 폭력, 긍정성의 폭력, 사이버 폭력 등 새롭게 부상한 폭력의 양태들에 주목한다. 편의상 폭력의 종류를 나누었지만 그것들은 많은 경우에 구분하기 어렵게 뒤섞여 있고, 폭력과 비폭력 또는 평화의 구분이 생각처럼 깔끔한 것도 아니다. 마지막 10장 ‘폭력 연속체’의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1994년 4월 후투족의 무참한 공격으로 투치족 4만5000~5만명이 숨진 르완다의 한 대학교 건물에 들어선 무람비대량학살기념관에 시신들이 미라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국가 폭력은 민주화의 정도가 떨어지는 나라들에서 특히 냉전 시기에 만연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제주 4·3사건이나 인혁당 사법 살인, 광주 5·18 등 “20세기 한국의 현대사는 국가 폭력의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의 일방적 폭력을 경험했다”. 강혁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박사후연구원은 국가 폭력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국내적으로는 포용적 제도를 만들”고 “국제적으로는 평화적 연대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제언을 내놓는다.

이병성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폭력과 연결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는 세속 이데올로기이다”.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 반공주의, 인종차별 등이 종교의 폭력성을 부추기는 대표적인 세속 이데올로기인데, 반미주의와 긴밀하게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 또는 “반공주의와 관련된 폭력 행사에 아주 깊게 관여”한 서북청년단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제 인권 체제에서 여성 폭력과 젠더 폭력이 개념이자 규범으로 형성된 과정을 살펴본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는 현행 ‘여성폭력방지법’ 등의 한계를 지적하며 엄중한 형사처벌을 강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젠더 폭력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와 해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용 일본 소카대학 문학부 교수는 공동체 폭력 개념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기후변화 및 환경 재난 관련 갈등을 분석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으며 아울러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적 민족적 소수자에 대한 여러 형태의 차별이 내포된 폭력성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고 쓴다.

지난 21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숨진 헤즈볼라 대원들의 장례식에서 시민들이 숨진 이들의 관을 둘러싸고 서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새롭게 등장한 폭력 개념 가운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이 생태 폭력이다. 이 개념은 초기에는 자원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에 대한 논의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의 피해가 부각되는” 쪽으로 강조점이 옮겨 갔다. ‘환경 정의와 인간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자, 자연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오늘날 논자들 사이에 합의된 생태 폭력 개념이다. 이나미 동아대 융합지식과사회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분단체제론을 비롯한 기존의 한반도 평화 관련 논의가 “생태 폭력의 관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점을 한계로 들며 “한반도 분단 자체를 한반도 생태계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하여 분단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한층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내놓는다.

한편 사이버 폭력은 “직접 대면하지 않아 상대방의 고통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에 가해자의 죄책감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익명성·집단성·기술 지배성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 불균형이 매우 크”고, “완벽히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고 거의 영구적으로 남기 때문에 피해자의 대처 의지를 약화시켜 취약성을 심화시킨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딥페이크(불법합성) 성범죄가 피해자에게 끼치는 해악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한다.

인도주의적 목적을 표방한 활동이 오히려 폭력적 상황을 초래하거나 폭력 행위로 변질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인도주의 폭력’, 그리고 “미묘한 차별이나 혐오, 배제와 같은 간접적 형태로 이루어”지며 “일상에서 되풀이되어 발생해 피해자조차 ‘정상’으로 수용하게 된” ‘일상적 폭력’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종류의 폭력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긍정성의 폭력’이다. 자유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성과를 향한 압박에 자발적으로 호응하며 무엇이든 긍정하고 수용하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착취하는 자세가 긍정성의 폭력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는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긍정성의 폭력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이며,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됨으로써 폭력의 원인이 모호해지고 폭력의 도식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이찬수 연세대 교양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은 다만 긍정성의 폭력 개념을 남용할 경우 가해와 피해가 분명히 구분되는 폭력 가능성을 도외시하며 “폭력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구체적 폭력의 긴박함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경계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책은 여러 필자들의 공저인데다 폭력의 다양한 유형을 살피느라 단일 주제를 깊게 파고들지는 못하고, 각 유형별로 좀 더 논의할 점들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세속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종교는 정치적인 문제들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사이버 폭력 개념을 좀 더 세부적인 범주로 구체화해 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그런 과제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다양한 폭력의 양상을 두루 짚고 있으며, 폭력의 유형별로 한국 사회와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참조할 내용들을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썩 유용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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