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연구의 거장이 보여주는 ‘혼신의 말하기’ [책&생각]

임인택 기자 2024. 9. 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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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윤식 교수의 유일한 강연록
“벼랑 끝 쓴 글만이 글” 강조한
문학적 실증주의자의 ‘근대문학’
2016년 3월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김윤식 교수(1936~2018). 그의 유일한 강연록이 출간된 데 이어 ‘김윤식 특별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시실)도 내달 열린다. 전시회는 ‘시간-책의 연대기’, ‘행위-읽고, 쓰고, 가르치기’, ‘공간-서재’ 등으로 나뉘어 한국 문학 연구의 대가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국문학사의 두 공간, 세 가지 글쓰기
김윤식 지음, 윤대석 엮음 l 소명출판 l 1만6000원

국문학자 김윤식(1936~2018)의 생애를 가장 잘 투사한 책의 제목을 꼽자면 ‘혼신의 글쓰기 혼신의 읽기’(2011)일 것이다. 교장이 되라 하여 사범대를 갔다가, 시 소설을 써보려다, 고시도 기웃하다가, 한국 문학에 빠진 이래 단 한 번 퇴색한 적 없는 김윤식의 태세였고 김윤식의 윤리였으며 김윤식의 유산이었다. ‘문학에서 인류까지’의 결사적 연구, 결곡한 현장 비평과 결부한다.

이번 출간된 ‘한국문학사의 두 공간, 세 가지 글쓰기’는 ‘혼신의 말하기’라고 소개해볼 법하다. 김 교수는 2007년 1월 나흘에 걸쳐 청중 앞에 선다. 장소는 서울 해방촌, 입시학원이 떠난 곳에 자리 잡은 ‘수유 너머’. 당시를 윤대석 서울대 교수(국어교육)는 “무척 추웠”던 겨울밤, “자발적으로 모인 청중들의 달뜬 호기심과 열기에 선생님께서도 약간 상기되신 듯,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 막차 시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강연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고 회상한다.

김윤식은 마지막 4강 뒤 귀갓길에 강연록 출판을 윤 교수에게 제안한다. 평생의 저작 200권 이상 가운데 유일하게 강연 자체가 책이 된 까닭이다. 그럴 대목도 아닌데 좌중 폭소하곤 했던 그해로부터 17년, 특유의 문체만큼이나 “눌변과 달변, 냉소와 정념이 뒤섞인 특유의 말투”가 울림을 주던 그가 떠난 지 6년 만의 일이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평생 펴낸 저작은 단독저술 150권 이상에 번역, 공저까지 200권이 넘는다. 2015년 팔순 전시회를 위해 아내 가정혜씨가 디자인한 김 교수의 저작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대중과 어지간히 유리된 비평·학문의 텍스트를 들고, 그것도 해방 전후 문학 공간을 주제로 강단에 서 그가 쏟아부은 강의는 ‘진리는 어떻게 진리가 되는가’로 시작된다. 진리는 역설적으로 오류가능성(칼 포퍼)을 동반함으로써 존재하고, 반증됨으로써 새 진리를 유발한다. 한국 근대문학의 주체성·특수성·개별성을 실증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김윤식에게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명제”는 ‘식민사관 극복’이었다. 국어학 교수밖에 없던 1960년 대학원에 진학(경성제대 조선어문학 첫 전공자인 도남 조윤제가 당시 “다른 데로 밀려났”다고 한다)하고 2년 뒤 문학평론가로 등단, 1968년 전임강사가 된 그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매듭지은 기념비적 작품이 김현과 완성한 그 ‘한국문학사’(1973)다.

그 책의 서언인바 “문학이 없는 시대는 정신이 죽은 시대”다. 당시 인문학이 식민사관 극복을 요망할 때 김윤식은 실증주의로 요결하고자 한다. 실상 ‘근대’는 정치경제와 역사의 언어다. 김윤식은 가령 “사랑을 다루되” 사랑이 “국민국가” “자본제 생산양식”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라는 현실 조건에서 “어떻게 되었느냐”가 한국 근대문학 연구라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표지될 수밖에 없는 광막한 세계를 활자 더듬어 기는 연구가 김윤식의 실증주의다.

이번 강연록은 거기에 대중성을 덧댄 격이다. 본문은 크게 세 갈래다. ‘일제 말기 이중어 글쓰기’, ‘해방 공간 민족문학 글쓰기’, ‘학병 세대의 체험적 글쓰기’. 각기 단행본(2004~07년)으로 심층 확장된 주제들이기도 하다.

일제 말 일본어로 글이 쓰인 공간(1942~45)은, 일본인 교수로부터 “진짜 일본말이고 자기도 모를 정도로 뛰어난 것이 많”은 일본어를 구사했다고 평가받는 이효석 부류(유진오·김사량 등), 본명과 가명(창씨개명) 두 전략으로 글 쓴 이광수 부류, 새 사조로 비평을 선도한 영문학 본위의 최재서 부류 등으로 유형화한다.

해방 공간(1945~48)은 세 가지 민족문학론을 각기 대표하는 문인으로, 남(자본 중심)의 김동리, 북(노동자 중심)의 안함광, 남북연합(민족·계급 통일)의 임화와 이원조(이육사의 동생)를 내걸어 조명한다. 제목 속 ‘두 공간’이다.

그것이 강연의 ‘벼리’라면, 청중들이 느닷없이 웃어 젖힌 대목들은 거개 핵심으로부터 노학자가 섭렵하여 종횡 방사해간 지적 사변에서 비롯했을 것 같다. 근대문학 공간의 갖가지 낯선 풍경이 활자만으로도 이리 생생해진다.

‘풀이 깊다’ ‘향수’ ‘노마만리’ 등 김사량 작품의 의미와 뒷얘기, 춘원의 동아일보 편집국장 부임이 가능했던 까닭, 도쿄에서 일본 인사들을 질책했다는 기록(‘삼경인상기’)의 사실 여부, 경성제대 사토 기요시 교수가 일본 영어영문학회에 일본인 제자들 다 빼고 최재서를 데려간 사정…. 최재서가 국내 소개한 주지주의를 설명하며, 김은국의 영문소설 ‘순교자’(1964)를 소개한다.

평양 배경으로 공산당에 총살당한 다른 목사들과 달리 (신을 믿지 않는) 한 목사가 살아남는다. 왜일까. ‘인간이 신이다’는 낭만주의와 이후 대항 사조로서의 주지주의를 대비해 당대를 감각시키면서, 불쑥 인민군 치하 서울의 석달을 다룬 염상섭의 ‘취우’(1952~1953), 유엔군 치하 평양의 두달 반을 다룬 한설야의 ‘대동강’(1955)까지 곁들이는 식이다. 도스토옙스키, 루이 아라공, 헤겔, 코제브, 바타유 등도 불시로 오간다.

‘학병의 글쓰기’는 해방 뒤를 이해하는 풍경이다. 1944년 1월 조선의 전문대 이상 대학생 4700명가량이 한날 징병된다. 일반 징병과는 달리 상류층이 많았다. 생환한 학도병들은 해방 뒤 “한국 건설 초기의 주역”이 된다. 박정희 군부 때까지 이어진다. ‘돌베개’를 쓴 장준하와 ‘장정’의 김준엽, 뜻밖으로 추리작가협회장을 지냈던 이가형(전 국민대 교수)이 대표적이다.

당시 학병을 거부하고 빨치산이 된 이들도 적잖다. 진주 유지 출신으로 일본 가라테 대회 우승자였던 하준수(이후 남부군 부사령관)가 손꼽힌다. 그가 와세다대 불문과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간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이 되고, ‘지리산’으로 공산주의를 비판해 지지받은 이병주는 박정희 비판 논설로 7년 넘는 옥살이 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썼다.

과연 문학 없는 시대 이해가 가능한가. 김윤식 보기에 191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사, 사회사 그 어떤 것보다 이광수의 ‘무정’으로 입체화한다. 발자크의 소설도 그렇다. 궁극적으로, 문학 특히 소설은 ‘인류사’를 비추는 거울이자 전망이 된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대로다.

“저는 이제까지 소설을 공부하고, 소설을 논하고…. 이유는 루카치 때문입니다. 인류가 어떻게 나아가야 황홀경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느냐…. 저 황당무계한 꿈, 저 망상을 버리고는 인류가 살 수 없습니다.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인문학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대단하구나, 이런 것이 문학이구나…” 지역·국가 단위나 민족을 넘어서는 인류사적 문학 연구에, 역설적으로 한국 근대문학은 불가결의 과제였던 셈이다.

신혼 초 젊은 김윤식 교수가 방송 출연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때마침, 김윤식 특별전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다음달 1일 시작한다. 평생의 저서와 연구자료, 메모·편지·사진 등이 전시되어 한 거장의 생애를 반추한다. 제목하여 ‘혼신의 글쓰기: 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 이번 책으로 먼저 단언하자면, “자신을 벼랑에 세우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 “결사적으로 하는 사람”의 글만이 바로 혼신의 글이다. 특별전 개막식은 오는 30일 낮 4시. 올해 전시회가 끝나면, 유가족 기증에 따라 자료 모두 국립한국문학관에 맡겨진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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