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상이, 왕빙이, 영화가 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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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지쳐 있었다.
"영화 앞에 앉는 건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영화를 본 다음 답답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중국 왕빙 감독의 '철서구'를 봤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정 평론가는 왕빙의 촬영 현장을 따라다니며 찍은 '천당의 밤과 안개'(2018)라는 영화까지 만들었다.
여기 세상이, 왕빙이,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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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가주의
왕빙, 영화가 여기에 있다
정성일 지음 l 마음산책 l 2만2000원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지쳐 있었다. “영화 앞에 앉는 건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영화를 본 다음 답답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중국 왕빙 감독의 ‘철서구’를 봤다. 9시간 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하루 종일 봤다. 영화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받아들일 거냐고. 1년에 영화를 수백편씩 보는 그가 10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영화.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데려가는 영화. 그게 시작이었다. 2003년이었다.
왕빙은 문화혁명이 시작되고 1년 뒤인 1967년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근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중학교 2학년이었다. 스무살 넘어 천안문사태를 겪었고, 사진을 배웠고, 영화 촬영을 공부했다. 1999년 왕빙은 작은 카메라 한 대를 빌려 센양(선양)으로 갔다. 기차가 다니는 거대한 공장단지, 톄시취(철서구)의 노동자들은 ‘중국식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해고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2년 동안 찍었다. 그사이 나라가 운영하던 공장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마을도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떠났다.
“누군가 의무를 갖고 영화를 만들 때 반대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책임 앞에 서게 된다.” 정 평론가는 책임감을 느꼈다. ‘철서구’는 그저 공간이 아니라 역사가 몰락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영화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나는 영화를 어찌 대해야 하는가. 그 길로 왕빙의 모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왕빙의 카메라를 통해 혼자 토굴에서 지내며 버려진 땅을 경작해 먹고사는 남자(‘이름 없는 남자’)를, 윈난성 해발 3200m 고원의 낡고 작은 집에 사는 어린 세 자매(‘세 자매’)를 만났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정 평론가는 왕빙의 촬영 현장을 따라다니며 찍은 ‘천당의 밤과 안개’(2018)라는 영화까지 만들었다.
정 평론가는 20여년간 파고든 왕빙의 모든 것을 한권의 책에 담았다. 단독저서로는 14년 만에 선보이는 ‘나의 작가주의: 왕빙, 영화가 여기에 있다’. 왕빙의 생애, 영화 9편 평론,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 나눈 인터뷰 등이 담겼다. 왕빙의 영화들은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으나, 국내 개봉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정 평론가 스스로 비평이 아니라 주석이라 할 만큼 자세히 풀어 설명해, 영화를 직접 보는 듯 생생하다. 여기 세상이, 왕빙이, 영화가 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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