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더하기] 개항장, 언제쯤 인천의 몽마르트르 될까

경기일보 2024. 9.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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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생산자, 프로슈머로 트렌드 변화
뮤직갤러리, 시작도 전 술집 논란… 본질 훼손
문화, 소수 전유물 아닌 모두에게 공유해야
김상태 ㈔인천사연구소장

최근 로컬리즘 트렌드가 소비자들을 저격하고 있다. 서울 성수동이나 부산 영도지역이 대표적인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트렌드의 변화가 아니라 소비자가 소비를 넘어 생산적 소비자인 프로슈머(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그 변화의 주체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옮겨 가는 추세다. 건국대 김시월 교수는 ‘소비는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일시적 유행이나 트렌드, 그리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행위는 개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를 모방해 동참함으로써 대중에게 확산된다’고 한다.

인천아트플랫폼 H동에 들어선 개항장 뮤직갤러리가 인천서점을 대신하면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대상공간을 활용해 시민과 문화예술을 공유하기 위해 카페, 북카페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일단은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의 책임은 오로지 인천문화재단에만 있을까.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문제는 없는 것인가. 새로운 대안으로 선택된 뮤직갤러리는 시작도 전에 왜 술집으로 방점이 찍혔을까. 커피나 빵 그리고 서점이 소재가 됐을 때는 어디에 방점이 있었을까. 요즈음 음주문화도 많이 변하고 있다. 맥주 한잔을 들고도 광장문화가 가능하고 흥겨우면 어깨춤도 자연스럽게 춘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 즐길 줄도 안다. 뮤직갤러리의 방점은 맥주가 아니라 음악이지 않을까.

공간성의 문제에서 문화예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세간의 시선은 본질보다는 술집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천맥주는 지역 맥주로 수제맥주를 만들어 인천을 알리고 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인천관광공사는 인천의 양념치킨과 인천맥주를 콜라보한 대규모 행사를 진행할 정도로 지역 맥주와 지역 치킨을 홍보하며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문화와 관광은 오감 만족의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이들이 한몫을 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에 등장한 뮤직갤러리는 과연 유흥업소인가.

어쨌거나 이 논란은 개항장이 활성화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적확한 진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술집 논란으로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문화예술에서 주체는 생산자만의 전유물일 수 없다. 소비자도 주체가 돼야 한다. 소비자가 외면하는 문화예술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역사학에서는 공공역사라는 용어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역사가 소수 연구자만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역사소비자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도 공공문화예술의 관점으로 옮겨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각예술에서 대학의 사진과가 폐과(廢科)되는 현실이 시사하는 바를 읽어야 한다. 시민의 참여와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당연히 개항장과 관련한 모든 사람의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는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의 장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처음 새롭게 등장한 말은 아니다. 대안 없는 제안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소위 책임질 일이 없는 ‘지적질’은 쉽다. 어느 한편의 생각만이 옳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때다. 역사나 문화나 예술이 소수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다. 역사든 문화예술이든 소비자가 없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꽃피던 시절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은 기억하지만 그 예술가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해는 깊지 않다. 그러나 현지에 가보면 이 메디치 가문에 대한 존중은 남아 있다. 이제는 인천에서 메디치 가문 같은 후원을 소비자에게서 받을 수 있는 예술가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관이 못하면 소비자가 하면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례는 다르지만 공론화 과정을 제시했던 20여년 전 신문에 기고했던 필자의 글을 다시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인천은 변한 것이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빠른 시간 내에 이런 먹먹함이 추억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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