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양방 물신주의
얼마 전 정부가 발주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사업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11% 갓 넘은 터무니없는 선정률에 어쩔 수 없다고 위안 삼으면서도 탈락 이유를 보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프로그램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을 질적 접근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정책제안서의 부합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고 사료됩니다.”
기존 연구는 양적 실태조사에만 기대고 있어 질적 실태조사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제안서에서 이 점을 강조했더니, 오히려 양적 연구를 무시하고 질적 연구만 수행한다는 억측으로 탈락시켰다. ‘사료됩니다’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관료제 문장에 기분이 상하는 건 덤. 이쯤 되면 학술활동을 지원하는 국가기관이 양적 방법론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깊은 의구심이 생긴다.
사회적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아 양적 방법론(양방)과 질적 방법론(질방)이 있다. 양방이 사회적 삶의 ‘통계적 의미’를 탐구한다면, 질방은 사회적 삶의 ‘문화적 의미’를 파고든다. 양방과 질방 모두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삶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을 만든다.
문제는 그 이후다. 양방은 개념을 측정 가능한 변수로 축소한다. 변수들 사이의 관계는 확률 형식의 방정식으로 표시된다. 방정식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특정 사건의 발생을 통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방정식이 일반법칙의 지위에 오른다. 양적 실태조사를 통해 방정식을 검증한다. 측정된 변수 간의 상관관계를 선형적, 시간적 순서로 나열해서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해 특정 사건의 발생을 예측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반면 질방은 개념을 정량화된 변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사회적 삶이 모두 숫자로 정량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개념을 사회적 삶을 포착하는 ‘은유’로 여긴다. 은유는 어떤 것(피설명항)을 다른 유사한 어떤 것(설명항)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한다. 양방에서 종속변수를 독립변수를 통해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은유다. 하지만 종속변수와 독립변수의 유사성이 너무나 커서 연계하면 변수들의 행로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의미는 창출되지 않는다. 양방은 이를 지시나 예측이라고 보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설을 통계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질방은 다르다.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뛰어넘을 정도로 유사성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피설명항과 설명항 사이에 의미의 긴장이 높아진다. 이 긴장에서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적 삶의 문화적 의미가 솟구친다.
양방과 질방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사회적 삶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술, 해석, 분석, 설명한다. 연구의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양방과 질방을 섞은 혼합방법론을 활용한다. 문제는 양방을 물신화하는 경우다. 양방 물신주의에서 숫자는 객관성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초자연적 권위를 얻는다. 숫자를 정확성, 공평성, 효율성의 화신으로 떠받든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숫자에 대한 강박은 일종의 물신주의가 된다.
현재 여러 위기 담론이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다. 저출산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과학자가 계급, 연령, 젠더, 지역, 교육 등 온갖 변수를 조합해 방정식을 만들고 경험자료로 검증한다 해도 출산율의 미래를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한다.
그동안 쏟아부은 천문학적 비용은 양방 물신주의가 합리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폭로한다. 숫자는 결코 저출산의 문화적 의미를 ‘스스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게 어찌 저출산 담론에만 해당하겠는가? 질적 연구를 통해 숫자로 포착할 수 없는 사회적 삶의 문화적 의미를 밝히고 이를 알맹이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희망이 보인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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