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누구를 위한 항소인가
2023년 6월에 국제중재판정소(ISDS)는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에 약 1300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2015년 (구)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승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을 동원해 부당하게 개입한 결과로 주가가 하락해 엘리엇이 손해를 봤다는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 달 뒤인 7월에 정부는 중재지인 영국 상사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국민연금이 (구)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동의한 것은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한 것에 불과해 ‘정부 조치’로 볼 수 없기에 ISDS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관할권 주장은 올 8월에 영국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연 이자 등으로 수백억원의 혈세가 추가적으로 지출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최근에 정부는 다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ISDS의 판정은 민사소송과 달리 단심이다. 즉 판정 내용에 불복해서 항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부는 관할권 다툼으로 판정 자체를 무효로 하는 소송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관할권 다툼 소송 제기가 국고 손실을 막기 위한 공익적 목적인지, 아니면 판정이 확정될 경우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분식회계, 주가조작, 뇌물공여 등 19개 혐의사실에 대한 1심 판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이재용 구하기’ 차원의 결정인지 여부이다.
작년 7월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할 때 정부는 여러 국내외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충분히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관할권 주장은 ISDS 판정 과정에서도 이미 우리 정부가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취소 소송 1심 법원마저 각하했는데, 또다시 항소한 것은 정부가 공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교과서적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을 동원해 부당하게 (구)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개입해 외국인 투자자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가입자와 국내 일반주주에게 손해를 끼쳤고, 외국인 투자자인 엘리엇과 메이슨에는 ISDS 판정에 따라 또다시 국민의 돈으로 손해배상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반해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이재용 일가는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승소 가능성이 없는 소송을 제기해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선택을 정부가 하고 있다. 이는 ‘제2의 국정농단’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재용의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국정농단 사건의 대법원 판례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이재용으로의 승계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를 근거로 이 회장의 분식회계, 주가조작, 뇌물공여 등 19개 혐의사실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ISDS 판정에서 인정된 정부의 부당한 개입과 모순되는 것이고, 1심 판결 이후 올 8월에 행정소송에서 삼성바이오가 ‘지배력 상실’을 이유로 에피스의 회계처리를 새롭게 한 시점을 임의적으로 판단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결과도 모순된다. 따라서 곧 시작될 이재용 회장의 2심 재판에 시선이 쏠리고 있는 시점에, 영국 상사법원의 판정 취소 소송에 패소하고도 또다시 항소하기로 한 것이 과연 우연일지 의문이다.
윤석열 정부에서처럼, 대통령 해외순방에 재벌총수 특히 삼성재벌 총수가 자주 수행한 적이 과연 있었는가? 이번 체코 방문에도 이재용 회장이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가? 이 회장은 산적한 삼성전자 현안에는 어떤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서도, 1년에 몇번이나 대통령을 수행할 여유가 있는가?
‘도덕적 해이’는 경제학에서 대리인이 ‘자신이 대리하는 사람(principal)’의 이익보다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도덕적 해이의 예시로 상장기업 경영인의 일탈을 흔히 든다. 그런데 민간 영역보다 오히려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 해이가 더 심각하다. 그 이유는 도덕적 해이를 해소하거나 방지할 유인체계의 설계가 공적 영역에서는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면서 정책적 판단이라는 핑계도 가능하고, 책임자가 퇴임하거나 임기가 종료된 이후에 정책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결정이 이뤄질 당시에 책임 있는 정치세력에 선거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끈질기게 묻는 것이 최소한으로 필요하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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