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꿀통배추

기자 2024. 9. 2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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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파동 얘기는 지금 삼척동자도 안다. 단순히 배추값이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여름 혹독한 더위를 겪으면서(사실 가을인 지금도 덥다) 기후 문제, 나아가 지구가 과연 이렇게 생존 가능할지 심각한 경고도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경제는 엉망이고 물가가 살벌하게 올라 민심이 분노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 배경인 듯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불안하다. 그래도 배추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보자.

1990년대에는 미국산 배추도 수입했던 정부는 흉악한 민심에 얼른 중국산 배추 수입안을 내놨다.

예전에도 종종 수입해왔고, 구한말에도 호배추(중국 배추)를 수입한 기록이 있다. 조선 배추보다 결구가 꽉 차서 통김치를 담그기 좋았다. 하지만 맛은 썩 좋지가 않았다. 해방 후 귀국한 우장춘 박사가 결국 이런저런 결구배추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품종을 내놓으면서 현재 우리 김장문화, 통배추 김치의 역사를 열었다. 옛날 우리 김장은 대개 반결구배추로 담근 장김치나 섞박지, 무가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통배추에 매운 양념을 버무려 넣는 방식이 시작된 것은 구한말 이후로 본다.

그 시절 신문기사를 보면 “훈련원(동대문 지역) 배추가 올라 방아다리(충신동 일대) 배추를 궁궐은 물론 장안에서 많이 쓴다”고 보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백종의 김치를 담가 먹는데 통배추 김치를 제일 많이 먹는다. 김장의 핵심도 통배추 김치다. 다른 김치와 달리 영양가가 높고 맛도 좋은 데다 요리를 해먹기에도 최적이다. 볶음밥, 찌개, 전, 지짐, 고기에 곁들이기 등 못하는 요리가 없다. 통배추 김치가 으뜸이 된 배경이다.

지금 배추 파동은 고랭지 문제다. 배추는 시원해야 잘 자란다. 고지에도 폭염이 지속됐으니 ‘랭’(冷)한 배추가 견디지 못했다. 더구나 이어짓기 피해로 병충해가 퍼진 건 몇해 전부터 일어나던 일이다. 시장 아는 상인에게 배추를 사러 갔더니 ‘죄다 꿀통배추’라고 한다. 꿀통이면 좋은 것 같은데, 실은 속이 곯아 꿀처럼 녹아내린다고 해서 붙인 자조적 별명이란다. 언론에 2만원짜리 배추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대개 포기당 1만원 정도다. 고랭지 배추는 여름에 수확하니 여름배추다. 김장은 여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가을배추다. 심각한 건 제일 수요가 큰 김장배추다. 심었더니 묘가 타고 녹아버렸다는 거다. 심을 때 기온이 너무 높았다. 당연히 김장배추 작황도 나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배추는 시원해야 잘 자란다고 앞에 썼다.

기상 예보를 보니 11월에도(!) 한낮 날씨가 여름 못지않을 거라고 한다. 한여름 그 더위에도 에어컨 아껴가며 선풍기 돌린 죄밖에 없는 서민들이 그 원죄를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다. 고기보다 상추가 비싸다는 뉴스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건 그나마 고깃집에 한정된 일이었다. 이제는 전 국민의 밥상에 직결되는 배추 문제다.

우리는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김치를 먹고 살고 싶다. 그저 그게 꿈이 될까 두렵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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