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도 건국 중 [김명인 칼럼]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대통령실 국가안보 분야 실질적 책임자라는 사람이 대통령 해외 순방 중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데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있는 동영상을 보았다. 그는 현 정권의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의 설계자라고도 하고 최근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단순한 실수였을까? 편견인지 모르나 내게는 분명히 의식적인 거부행위로 보였다. 나도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말기에는 저녁 무렵 국기하강식이라는 것을 시행했고, 그때 온 거리에 애국가와 함께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이 낭송되기 시작하면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가까운 국기게양대를 향해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 ‘애국적 실천’을 해야 했다. 그 무렵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던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런 강요된 집단적 애국 행위를 거부했다. 나의 거부행위는 그 강제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당시 ‘대한민국’ 자체가 싫었다. 1948년, 미군정의 지배 아래서 정통성이 희박한 이승만 일파에 의해 한반도의 반쪽에서만 수립된, 그리고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외세 의존적 장기독재 체제로 일관해온 그 나라가 내 나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순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그 고위층 인사의 내면에도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에서 말하듯 그가 마음의 조국이 일본인, 뼛속까지 친일파이거나 심지어 대한민국 권력 핵심부에서 암약하는 ‘밀정’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여전히 ‘반일 종족주의’와 좌파적 역사 인식의 헤게모니에 강력히 사로잡혀 있는, 그리하여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을 건국 원년으로 고집하고 있는 현재의 한심한 ‘대한민국’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같은 목적의식적인 의례 거부를 실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는 혹시 무정부주의자일까?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철두철미 자신의 사상적 원칙을 실천하고 있는 확신형 지식인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단순한 실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현 권력 핵심층 인사들의 돌출적 언행이 이제는 더 이상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우리는 최근 노동부 장관, 방송통신위원장, 독립기념관장 등 대소의 국가 요직에 임명된 고위 인사들이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자신들의 비정통적 역사의식을 노골적으로, 또 당당하게 피력하는 것을 수차례 목도하고 있다. 바야흐로 ‘관종형 극우파’들의 세상이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동안 비주류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세칭 뉴라이트 역사관이 목하 하나의 경쟁력 있는 관점으로 슬며시 공론장의 한 자리를 점유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 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전쟁’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뉴라이트 세력이 드디어 진지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까. 이것은 역으로 이제까지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주류적 해석 역시 하나의 유동적 가설로 표류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연 역대 최악의 부실 정권하에서 일어나는 비주류들의 일시적인 호가호위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뉴라이트 역사 해석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인 ‘1948년 건국설’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 역시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1910~1948년의 한반도의 역사 현실을 나라 없는 미정형 상태로 규정하여 식민지 사회 성격이나 친일 문제 등을 중립화하고 해방 후 진행되었던 다양한 스펙트럼의 건국 담론들을 한꺼번에 일축해 버리고자 하는 뉴라이트들의 1948년 건국론의 숨은 속내를 몰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1919년 건국론에 내재한 문제점을 모른 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망명지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것은 영토도 주민도 통치행위도 없이 상징적 국체만 존재하는 임시국가였으며, 해방 직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 채 하나의 ‘정파’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대한민국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1919년이 대한민국 건국의 원년이라는 것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1919년 대 1948년의 건국 기점 논쟁은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진짜 핵심은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있는 1919년 임시정부 법통 계승 조항의 실효성을 둘러싼 충돌이다. 1919년 법통설의 인정 여부는 곧 식민지 시대 일제의 총독부 통치를 비정상 상태로 보는가 아니면 정상 상태로 보는가 하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뉴라이트들이 이 법통 계승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식민지 상태의 무정부성을 부각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 때문에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다. 비록 친일 냉전 반공 친자본주의적 태생성을 가졌고 그 때문에 나와 같은 좌파들에게는 두고두고 못마땅한 것이지만 그 내부에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와 해방 직후의 다양한 나라 만들기의 염원들이 체화되어 있으며, 4·19와 5·18과 6월항쟁이라는 민주 항쟁과 놀라운 경제성장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성취에 의해 역동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열린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역동적인 역사 과정의 한 주체로서 참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본 제국주의와 반공·냉전 세력, 군부독재 세력, 외세 의존 세력, 자본가 세력 등 지배자들의 역사만으로 다시 쓰려는 뉴라이트들의, 역설적으로 노예적인 역사 인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나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로 범벅된 역사 인식들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역사 인식들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긍정할 수는 있다. 역사전쟁이 더 필요한가, 좋다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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