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갑부 컬렉터 전시장에 차이콥스키 ‘비창’이 흐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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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 거리 건너편을 향해 목숨 건 질주를 해야 한다.
헉헉거리면서도 '비창'을 흥얼거리며 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가 거리를 건너가는 여러 이미지들은 악단이 '비창' 1악장 리허설을 하는 이미지와 겹쳐진다.
'비창'을 흥얼거리는 여성의 허밍과 가쁜 숨소리, 오케스트라 연주가 결국은 하나의 선율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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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 거리 건너편을 향해 목숨 건 질주를 해야 한다.
젊은 보스니아 여인은 숨을 고른 뒤 나지막하게 흥얼거린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의 그 유명한 안단테 소절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긴장된 표정으로 숨을 가다듬고 거리를 가로질러 전력을 다해 뛴다. 다행히 저격수 총에 맞지 않고 거리를 건넜다. 헉헉거리면서도 ‘비창’을 흥얼거리며 한 건물로 들어간다. 그곳은 사라예보 시립교향악단이 차이콥스키 교향곡 리허설을 하는 공간이다.
알바니아 출신 작가 안리 살라가 1992~95년 보스니아전쟁 당시 수도 사라예보 포위전의 참상을 다룬 비디오 영상작품 ‘빨강 없는 1395일, 2011’의 한 장면이다. 카메라는 여성 음악가가 오케스트라 연습을 위해 세르비아군에 포위된 사라예보 거리를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가는 모습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그가 거리를 건너가는 여러 이미지들은 악단이 ‘비창’ 1악장 리허설을 하는 이미지와 겹쳐진다. ‘비창’을 흥얼거리는 여성의 허밍과 가쁜 숨소리, 오케스트라 연주가 결국은 하나의 선율로 이어진다.
이는 스위스 건축 거장 듀오 헤르조그 앤 드뫼롱의 수작으로 유명한 서울 청담동 송은문화재단 사옥의 미술관 송은 2층 홀에서 상영되고 있다. 스크린 아래로 바깥의 식물 정원이 보이는 통창과 1층 로비 계단이 나있어 관객들이 창을 끼고 무심하게 이동하는 모습과 영상 속 여인의 필사적인 이동 장면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영상을 감상하는 내내 1층 로비와 2층 홀 공간에는 간드러진 오페라 아리아가 끊이지 않고 흐른다. 지하 2층에서 상영중인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의 영상 설치작품 ‘오페라(QM.15)’의 사운드다. 지하 공간 구석에 가설무대를 짜놓고 작가가 실제 칼라스로 분해 직접 몸짓을 하며 공연하는 영상을 홀로그램 기법으로 보여주는 이색 작품이다. 지하 2층 공간의 뚫린 천장을 통해 도미니크가 연기한 칼라스의 실제 아리아 발성은 천장 주위와 1·2층 전시장까지 울려 퍼진다.
크리스티 경매사의 소유주이자 생로랑, 구찌 등 명품 브랜드가 속한 케링그룹의 창립자인 세계적 갑부 프랑수아 피노의 컬렉션 일부를 한국에 선보이는 전시가 지난 4일부터 미술관 송은에서 열리고 있다. ‘컬렉션의 초상’이란 이름이 붙은 이 전시는, 피노가 2021년 프랑스 파리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에 컬렉션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를 열 당시 개관전에서 소개했던 작가들 가운데 22명의 작품 64점을 선보인다.
마를렌 뒤마, 뤼크 튀망, 피터 도이그, 플로리안 크레버, 셰르 세르파스, 루돌프 스팅겔 등 회화 분야에서 뛰어난 이들의 작품과 아프리카계 미국 작가 데이비드 해먼스의 산업재료 등을 활용한 근작들이 2·3층에 나왔지만, 무엇보다 수집가로서 피노의 뛰어난 감각을 일깨워주는 건 도미니크와 안리 살라의 영상 설치작품들이다. 시간과 공간, 정신과 육체, 과거와 현재 등에 대한 예민하고 집요한 감각을 보여주는 최고 수작들이다. 헤르조그 앤 드뫼롱의 혁신적인 공간과 찰떡 궁합으로 어울리며 소리와 이미지를 피워올린다. 11월23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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