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의 고백…“안녕, 나는 켄터키 블루 그래스야”
안녕, 나는 켄터키 블루 그라스야.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축구장에 가장 많이 깔렸어. 내 소개를 좀 해볼게.
잎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자라는 편이야. 그래서 선수들이 공을 다루기 편하고 부상 가능성도 적지. 내 뿌리가 20㎝ 정도 깊게 내려가면 많은 사람이 밟아도 쉽게 상처받지 않아. 회복도 빨라서 금방 파래져.
나는 서늘한 곳에서 잘 자라. 뜨거운 햇빛과 높은 온도, 많은 수분은 부담스러워. 물을 과하게 주면 나는 오히려 약해져. 물이 많으면 뿌리를 깊게 내릴 필요가 없거든. 비든, 선수들이 원해서 뿌리는 물이든 물이 많으면 나는 금방 파이고 뽑혀. 무더운 여름에 나를 너무 짧게 깎지 마. 잎이 짧아지면 햇빛에 직접 노출돼 쉽게 지쳐. 공이 덜 구르더라도 조금은 이해해줘.
배수도 아주 중요해. 우리 바로 아래 모래가 30~40㎝ 깔려 있어. 이게 오래되면 딱딱하게 굳어져 물이 잘 빠지지 않게 돼. 나를 밟을 때 질척거리는 부분이 바로 모래가 딱딱해진 곳이야. 자주 살펴보고 딱딱한 곳이 있으면 구멍을 뚫어줘. 다른 구장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바닥 공사 자체가 잘못된 곳도 적잖아. 그런 곳에서는 우리를 자주 바꿔봐야 소용없어. 그 돈으로 바닥을 뒤집고 새로 공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야.
나는 폭염 속에서 햇빛에 노출되면 쉽게 말라. 그래서 가능하다면, 잠시라도 그늘을 만들어 주면 좋겠어. 텐트 같은 구조물로 가려주는 식이지. 선수들이 많이 밟는 부분이라도 좀 더 가려줘. 그거 알아? 영국, 일본에 있는 개폐식 구장은 천국과 같아. 비가 많이 내리거나 햇빛이 과하면 지붕을 닫아주거든. 나도 요즘 같은 폭우, 폭염 속에서는 해외 친구들이 부러워.
환기와 통풍이 잘 돼야 곰팡이나 병해충에 덜 걸려. 물, 햇빛 못지않게 바람이 엄청 중요해. 그런데 한국전용구장은 바람이 잘 안 통해. 지면보다 낮은 곳에 운동장이 깔려서 더 숨이 막혀. 자연바람이 없으면 송풍기라도 넉넉히 틀어줘. 트랙이 있는 종합운동장에 깔린 친구들은 바람이 잘 통해 오히려 더 잘 자라지.
비료를 너무 많이 주는 건 위험해. 과도한 비료는 뿌리를 태우거나, 수분을 많이 빨아들여서 성장에 방해가 돼. 봄에 비료를 조금 더 주는 게 내가 촘촘하게 자라는 데 도움이 돼.
가장 중요한 것은 뭔지 알아? 그건 나를 가능한 한 덜 밟는 거야. 물론 최적의 상황이라면 1년에 80~120회 행사를 견딜 수 있어. 그런데 한국에서처럼 돈도 안쓰고 우리를 다루는 기술도 없는 데다 사람까지 부족한 데 우리를 자꾸 밟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어. 일본, 영국 경기장에는 송풍기, 에어콘, 광합성을 위한 인공 채광기도 설치됐고 심지어 경기장 바닥에 온수·냉수관까지 깔려 있어. 아마 수천억원이 들어갔을 거야. 나도 거기로 갔으면 지금보다 훨씬 대접받고 훨씬 편한 삶을 살았을 텐데. 한국으로 온 이상 어딜 갈 수도 없고, 다만 한여름 한달 반 정도를 날 좀 건드리지 말고 쉬게해주면 안 될까.
요즘 내가 국내 언론을 통해 큰 인기를 끌고 있더라고. 그런데 대부분 나를 잘 모르고 관계자들만 닥달하는 것 같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더해주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가능한 한 줄여줘. 잔디 관리자, 경기장 대관자, 정책 결정자, 그리고 선수단까지 모두 합심해서 양보하고 노력한다면 나는 조금 더 건강해질 수 있어. 푸른 색깔과 향기로운 냄새, 부드러운 촉감, 오랜 생명력 모두 여러분 손에 달렸어. 잘 부탁해.
김세훈 기자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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