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에 2년 묵었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어떻게 역대급 반전을 이뤘나

박진규 칼럼니스트 2024. 9. 2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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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은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동명의 독일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MBC 금토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창고에서 벌어진 고교생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드라마다. 원작과 결이 같아도 디테일은 한국의 설정에 어울리게 고쳤으며, 인물들의 성격 역시 원작보다 한국인 정서에 맞게 수정한 부분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진입장벽이 낮은 드라마는 아니다. 일단 억울한 살인누명을 쓴 고정우(변요한)의 누명이 중반부 이후에야 슬슬 벗겨진다. 궁금함을 불러일으키고, 이야기의 흐름 역시 탄탄하지만 최근 드라마들에 비해 전개속도는 더디다. 톱스타를 전면에 내세워 일단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작품도 아니다.

더구나 이 드라마는 방영 시기도 악조건이 겹쳤다. 경쟁 시간대의 SBS <굿파트너>가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이 상승세는 드라마 종영까지 계속 고공행진이었다. 또 '창고드', 소위 제작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방영할 곳을 찾지 못해 묵혀졌다는 오명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악조건 속에서 서서히 시청자를 확보해가는 힘을 발휘해 갔다. 놀랍게도 첫회 2%대에서 시작한 시청률은 현재 11회 넘어가면서 10%를 넘보고 있다.

이처럼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인기를 끈 이유는 이 드라마가 스릴러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드라마가 지닌 연재물의 재미를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변영주 감독 특유의 '겉멋' 없는 다큐 같지만 은근히 스타일리시한 연출도 드라마와 잘 어울렸다. 수많은 스릴러형 드라마들이 이야기 전개보다 대사와 미장센에서 특유의 겉멋이 있었다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그런 겉멋 대신 정석적인 사건 전개와 배우들의 앙상블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의 성공에는 캐릭터들의 부딪힘을 잘 살려낸 배우들의 호연에 큰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모든 음모의 키를 쥐고 있는 무천경찰서장 현구탁 역의 권해효는 30년 전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진지한 코믹캐릭터 조연으로 드라마에 데뷔한 이후 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고 섬뜩한 배역을 맡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작품 내내 현구탁의 섬뜩한 포커페이스를 연기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아들의 목 맨 시체를 보고 오열하는 아버지 연기에서는 이 배우의 '짬'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또 형사 노상철 역의 고준 역시 JTBC <미스티> 이후 오랜만에 인상적인 캐릭터도 돌아왔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형사 역이지만 고준은 리얼한 생활 형사의 모습과 고정우와 케미를 만들어내는 유쾌한 앙상블까지 모두 소화해낸다. 특히 이 배우 특유의 겉멋 없는 형사 연기가 드라마와도 잘 어울린다.

한편 이들만이 아니라 중년의 조연들 역시 호연을 보여주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왔지만 KBS <미녀와 순정남>에서 존재감 없던 배우 이두일은 이 드라마에서는 은근히 포악한 내면을 지닌 신추호의 내면을 드러내며 표정과 분위기만으로 드라마에 스릴러적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예영실 국회의원으로 등장한 배우 배종옥 역시 중반 전까지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확실하게 캐릭터를 각인시키는 베테랑 배우의 모습을 톡톡히 보여줬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도 빼어났다. 고정우의 절친에서 실제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변한 양병무, 신민수 역의 이태구나 이우제는 물론 현건오와 현수호로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간 이가섭까지 저 배우가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질 정도였다. 또 ENA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서부터 시작해 시골마을 미스터리 추적자 역할 롤이 된 듯한, 배우 김보라는 이번에도 비슷한 하설 캐릭터로 시청자의 시선과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이 수많은 캐릭터들의 호연 속에서 변요한은 빛을 잃지 않고 암울한 주인공 고정우의 몫을 이 드라마에서 충실히 해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소위 말해 '창고드'지만 창고 밖에서 빛을 발한 흔치 않은 경우다. 하지만 시각을 더 넓혀 스크린 쪽으로 가보면 영화 <핸섬가이즈>처럼 개봉시기를 놓쳤던 영화들도 크게 흥행이 가능한 추세다. 어떤 콘텐츠들은 시기를 놓치면 트렌드를 잃어 빛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트렌드와 상관없이 이야기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앙상블이 어우러진 작품이라면, 어느 시기에서든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특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처럼 수많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를 확보해가는 걸 보면 드라마의 기본은 역시 스타 캐스팅이 아니라 흡인력 있는 이야기와 그걸 소화하는 배우들의 조화에 있는 듯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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