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재선충병③] 방제 전략에 안전이 없다
박찬범 기자 2024. 9. 26. 09:12
재선충병 방제 지침서
산림청에 만든 ‘소나무재선충병 방제지침’이 있습니다.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이 재선충 방제에 토대가 되는 틀이라면, 방제지침은 보다 세세하게 방제 방식이 적힌 일종의 매뉴얼입니다. 재선충병 방제 조직, 예찰, 진단, 방제 시행, 방제 방법, 행정 절차 등 관련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각 지자체는 산림청에서 만든 이 방제지침에 근거하여 방제를 진행합니다.
여름철에는 왜 방제를 안 할까?
취재진은 지난 8월 재선충 감염 소나무 군락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이때는 산림청과 각 지자체가 방제를 하고 있지 않던 시기입니다. 그렇다 보니 재선충 감염 소나무가 현장에서 더 잘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기에 방제를 안 하는 건 방제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방제지침상 일반적으로 10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만 방제를 합니다.
재선충을 퍼뜨리는 하늘소의 생태 특성을 고려한 결정입니다. 하늘소는 대개 4~5월쯤 성충이 돼 나무 밖으로 나와 이동을 합니다. 그전에는 소나무 몸통 안에서 알, 번데기, 유충 등 상태로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소가 재선충 감염 소나무 안에 있을 때 베어내야만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하늘소가 밖에서 활동할 때 나무를 베어내면 하늘소가 여기저기로 튀면서 오히려 재선충병을 퍼뜨리는 역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병충해 방제 관점에서 볼 때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방제를 하는 건 당연한 결정입니다.
방제지침에 안전이 없다, 7~9월 골든타임
산림청이 만든 재선충 방제지침은 별지를 포함해 270페이지가 넘습니다. 방제에 관한 모든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다만, 안전을 위협하는 재선충 감염 소나무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베어낸다든가 하는 예외 적용 조항이 보이지 않습니다.
병충해 관점에서는 10~3월이 효율적이 방제기간일 수 있겠지만, 재난·안전 관점에서는 공백기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특히 태풍, 장마철인 7~9월이 시기적으로 위험합니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비가 많이 내려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곤 합니다. 재선충 감염 소나무 군락지 역시 이때가 가장 취약합니다. 재난·안전 관점에서는 7~9월이 가장 중요한 방제 시기인데, 골든타임을 놓치는 격입니다.
경주를 방문했을 때 여름철에 베고 싶은 재선충 감염 소나무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일단 지자체에 신고를 하고 방제기간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합니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산림청에서 만든 방제지침에 방제 기간이 명시돼 있는데, 이를 어기고 방제를 강행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산림 정책 담당자들의 고민도 있습니다. 재선충 소나무가 안전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방제지침에 안전 관련 예외 조항을 두는 것에는 회의적인 입장도 있습니다. 이를 악용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 민원인이 자기 지역에 재선충 감염 소나무를 빨리 베어내고 싶을 때 안전과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들먹이며 즉각적인 방제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지역의 재선충 감염 소나무 군락지의 위험성 유무를 정량화해 평가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재선충 방제, 연중 기획해야”
일부 전문가 그룹은 재선충병이 전보다 3배 가까이 급증한 상황에서 방제를 특정 기간에만 해선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병충해를 넘어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라면 기간을 정해놓고 방제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규원 산림기술사는 방제 지침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라고 말합니다. 그동안은 산림 보호 관점에서 확산 저지에만 총력을 기울였다면, 앞으로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부분을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규원 산림기술사는 특히 영남 해안가 급경사지의 마사토 지역의 피해를 우려합니다. 이곳이 향후 집중 호우가 쏟아졌을 때 산사태에 가장 취약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만이라도 먼저 안전 진단을 진행한 뒤 방제 기간에 구애받지 않는 즉각적인 방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기력감 경계해야“
재선충 감염 소나무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과부하가 걸려 있습니다. 지자체 산림과 직원들은 피로도를 넘어 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합니다. 특히 영남 지역이 그렇습니다. 지자체가 재선충 감염 소나무를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거나 방관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확산을 저지하지 못했을지언정 안전 문제를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위험 요소인 재선충 감염 소나무를 제거하는 것은 예방 차원의 활동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확산 속도도 늦추면서 위험 요소도 함께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선택해야 합니다. 안전 문제에 더 우선순위를 둔 방제 전략을 짜봐야 할 때입니다.
박찬범 기자 cbcb@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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