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믿지?" 그렇게 다가온 범죄자들…그루밍 성범죄 [스프]

김보미 기자 2024. 9. 2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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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피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인간관계에 있어 신뢰가 갖는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상대방과 소통할 때 즐거운 감정을 배로 느끼게 할 수도 있고, 조직을 성장하게 하는 데도 굉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신뢰가 견고해질수록 경계심도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한번 깊어진 신뢰는 '이 사람이 설마 그럴까?', '에이 아닐 거야'라는 현실 부정을 낳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신뢰가 지닌 힘을 악용한 범죄들이 등장하고 있고, 신뢰가 지닌 힘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이번 <더 스피커>에서는 신뢰를 가장한 악(惡), '그루밍 성범죄' 실태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제가 떳떳해도 될까요?"... 스스로를 가두는 피해자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에서 또다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집단 성범죄가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히데팸'이라 불리는 성인 남성 집단이 어린 여학생들을 상대로 폭행, 갈취, 성범죄 등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만 16세 미만의 어린 여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피해를 당하고도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 관련 기사 [단독] "맛있는 거 먹자" 친절한 연락…상상도 못한 일 펼쳐졌다 (끝까지 판다)
[ https://www.youtube.com/watch?v=Q8E13kHmwtI&t=11s ]
 
그런데 기자님, 제가 떳떳하게 인터뷰를 할 사람이 될까요?
어떻게 보면 걔네가 피해를 줄 걸 알면서도, 계속 연락을 이어갔던 건 저였거든요.


- 피해 학생 A 양

피해 학생 A 양이 인터뷰 직전 저에게 건넨 메시지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범죄 피해를 겪은 후에도, 가해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얼마나 의심하고 스스로를 탓해왔는지 말입니다. A 양은 15세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임신과 불법 낙태를 겪어야 했습니다. 상대는 우울증 갤러리를 통해 알게 된 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당시 A 양은 가정 환경 문제로 우울감과 불안함을 느껴 기댈 곳을 필요로 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이 남성들이 손을 건넸습니다. 결핍되어 있던 '사랑'과 '공감'을 채워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남성들은 폭력을 행사하고 성관계까지 강요했지만, A 양은 이런 상황이 헷갈렸습니다.
 
한창 우울증도 심했고 의지할 데도 없었고 다른 애들은 친구 만나고 그러는데 저는 그런 것도 잘 못해서 그냥 걔(가해자)만 연락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계속 만났어요.

'내가 사랑해서 때리는 거다 안 맞을 거냐' 이런 식으로 계속 안 맞아주면 뭐 '연락 그만한다' 이런 식으로 해버려서 계속 그렇게 맞았던 것 같아요.


- 피해 학생 A 양

A 양은 남성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에 멍이 들도록 때리고, 자해를 시키는 등 끔찍한 폭력을 가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믿음'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A 양을 비롯해 취재 중에 만났던 피해자들 대부분 자신이 범죄 피해를 입은 것이란 걸 인지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통적으로 우울감을 느끼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가해 남성들은 이런 상황을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척하며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다가왔습니다. 폭력을 가하거나 성적인 행위 등 부적절한 요구를 할 때도, 대놓고 위협적인 협박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늘 친절의 탈을 쓴 채로 행동하며,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따르게끔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학생들은 피해를 겪으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애정이고, 어디서부터 폭력인지 구별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루밍 범죄'의 전형적인 피해 형태입니다.
 

'믿음'을 이용한 교묘한 범죄

그루밍(Grooming) 범죄는 말 그대로 '길들이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성인인 가해자가 아동인 피해자와 친분을 쌓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우월한 지위를 악용해 취약한 아동·청소년 피해자에게 성적인 착취·가해 행위를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학자들은 그루밍 범죄가 6단계를 거쳐 완성된다고 분석했습니다. 범행 단계는 이렇습니다. 먼저 가출을 한다거나 방임 상태에 놓인 취약한 어린 청소년을 가해 대상으로 고릅니다. 이후 친절을 베풀면서 안심하게끔 행동하며 신뢰를 쌓아갑니다. 밥을 사준다거나 잘 곳을 제공해 준다거나 피해자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충족시켜 주고, 자신에게 의존하게끔 만듭니다. 서서히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고, 이후에 피해자에게 '우리 둘의 비밀'이라는 식으로 외부에 알리지 않게끔 회유나 협박을 합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경계심을 무너뜨린 후, 성착취 관계를 완성시키는 겁니다.
 

광범위하게 번져가는 '온라인 그루밍'

그루밍은 최근 새롭게 등장한 범죄 형태는 아닙니다. 이전에는 원래 알고 지내던 관계에서 친분을 악용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범죄로 규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렸습니다. 지난 2014년에는 15세 여중생이 연예기획사 대표인 가해자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했는데,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돼 무죄를 받기도 했습니다. 2018년에는 30대 남성이 10대인 조카와 성관계를 맺고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무죄 판결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루밍'이란 개념이 생소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치부되던 엄혹한 시절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그루밍 범죄'의 존재를 부각시켰습니다. 스마트폰 대중화로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면서,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과도 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취약한 상태의 아이들을 범죄 대상으로 물색하기가 한층 쉬워졌습니다. 이번 우울증 갤러리 '히데팸' 사건이 그 사례입니다. 가해 남성들은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를 매개로 전국에 있는 미성년자들에게 접근했고, '밥 사주겠다', '재워주겠다'고 유인을 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오피스텔까지 찾아갔다가 범죄 피해를 입게 됐습니다.


이렇듯 최근 들어 피해 사례가 많이 나오자, 우리 사회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온라인 그루밍'을 하나의 범죄 유형으로 규정해 입법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2019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기폭제가 됐습니다.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온라인 대화를 이어가는 행위에 대해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청소년성보호법이 개정됐습니다. 또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한해서 위장수사도 가능하게끔 했습니다. 최근 경찰은 법 개정 후 지난 3년간 515건의 위장수사를 실시해 피의자 1,415명을 검거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배포가 77%로 가장 많았고, 성착취 목적의 대화, 즉 온라인 그루밍은 4%를 차지했습니다.
 

'진짜 신뢰'를 불어넣어 주는 사회


다행히 처벌은 한층 강화됐지만, 그렇다고 적발이 쉬워진 건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루밍 범죄는 피해자에게 위력을 가하지 않고도 범행이 이뤄집니다. 그렇다 보니 범죄 행위가 수면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번 '히데팸' 사건의 경우, 일부 피해자들은 가해자들과 관계를 끊어내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계속되는 설득에도 신고를 꺼려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알릴 수가 없어서, 가해자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혹은 스스로 피해라고 생각을 안 해서 등의 이유였습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남성들에게 은연중에 위협을 받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가해자가) '너 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 해서 제가 '너 설마 영상 가지고 협박하는 거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똑똑하네?' 이러면서 영상을 유포하겠다는 듯이 말을 한 적이 있어요.

- 피해 학생 A 양

'자기 죽을 거다 나는 너한테 진심이었다' 막 그런 말들 하면서 죽을 거라고 했고, 가해자 지인이 저한테 '네가 고소 취하 좀 해봐라'고 말하면서 (취하 안 하면) 자기도 죽겠다면서 협박했어요.

- 피해 학생 B 양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보미 기자 spri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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