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가 된 매춘부 리스트…신간 '코번트가든의 여자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영국 런던의 상업 중심지 코번트가든에는 고급문화의 상징인 로열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일대에서는 길거리 공연도 수시로 벌어지며 코번트가든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어우러진 런던의 대표 관광지로 거듭났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약 250년 전 그곳의 모습은 현재와 달랐다. 어둠이 깔리면 증기탕, 식사, 성매매를 같은 지붕 아래서 즐길 수 있는 세계가 펼쳐졌고 남성 귀족들은 이에 열광했다. 세인트폴교회가 이런 코번트가든을 내려다보는 곳에 서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다.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유명한 책자가 있다. 바로 1757년 처음 나온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이하 '해리스 리스트')다. 아일랜드 출신의 빈털터리 시인 새뮤얼 데릭과 술집 웨이터, 런던의 유명 접대부가 런던 매춘부들의 이름과 특징을 상세하게 기술한 이 책의 인기는 대단했다. 1795년까지 40년 가까이 개정판을 거듭해 내면서 25만부나 팔렸다.
'해리스 리스트'의 판매량은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에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애덤 스미스자(1723∼1790)의 '국부론' 등 오늘날까지 유명한 고전들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역사가인 핼리 루벤홀드는 최근 번역 출간된 '코번트가든의 여자들'(북트리거)에서 18세기 런던의 유곽을 배경으로 활동하던 술집 주인, 포주, 손님, 사기 도박꾼 등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준다. 그는 '해리스 리스트'의 여러 판본에서 1천여명의 인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회고록, 편지, 재판 기록, 출생·사망 기록 등의 자료를 조사해 '신사의 도시' 런던의 그늘진 역사를 파고든다.
18세기는 웨이터가 취한 손님의 부탁을 받고 술집에 있는 여자나 안면이 있는 주변의 여자를 데려다주며 포주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커피 외에도 술과 음식까지 제공하며 사교클럽의 역할을 했는데 이곳에 모인 남자들은 격식 있는 식사를 하고 정치, 과학, 예술 토론을 하다가 결국에는 방탕한 밤을 보냈다.
조끼 주머니에도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 '해리스 리스트'는 성 구매자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서문에는 "남자들의 폭력적인 본성을 누그러뜨리고 달래려면 매춘부들이 몸으로 안아 줘야 한다"는 주장이 담기기도 했다.
책은 당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성 노동자의 상당수가 극빈층 출신이었으나 '해리스 리스트'에 나오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사생아이며 마담의 딸인 샬럿 헤이즈처럼 대를 이어 매춘업을 운영하며 경제적 여유를 누린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나 필요할 때만 돈을 받기 위해 성관계를 하는 눈에 덜 띄는 여성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노동에 대한 보상이 박했던 점과 성매매의 연관성에도 주목한다. 세탁, 수선, 의류 제작처럼 전통적인 여성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매춘으로 부족한 수입을 채우려 했다고 책은 전한다. 행상하는 여성의 경우 생계를 위해 물건을 파는 이들과 벌이가 좋은 성매매를 감추기 위해 물건을 판매하는 이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행상과 성매매가 불가분의 관계로 여겨졌다.
신분 상승을 꿈꾸며 런던의 뒷골목을 전전하다 대부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의 흔적이 시간을 뛰어넘어 책에서 되살아난다. 저자는 남성의 시선으로 범벅이 된 '해리스 리스트'에서 틈새로 당시에는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쓴다.
"'해리스 리스트'에서 우리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때로는 동정적이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았던, 여성을 대신해서 말하는 남성들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중략) 많은 여자들의 잊혀진 삶을 하나씩 되살리고 나니, 이들이 1795년의 마지막 '해리스 리스트'와 함께 역사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묘하게 위로가 된다."
정지영 옮김. 권김현영 해제. 456쪽.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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