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감자 같은 세금…울퉁불퉁하더라도 손대지 않는 게 좋아”

안선희 기자 2024. 9.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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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희 논설위원의 직격 인터뷰 |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차관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이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양극화, 감세, 가계부채 등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코로나 위기는 끝났지만, 위기가 남긴 그늘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케이(K)자형 회복’이라는 말이 예견했듯이 위기를 거치며 우리 사회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위기의 후유증 탓에 닥친 고물가와 고금리에 영세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은 한층 더 타격을 받고 있고, 가계소득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치유해야 할 정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현 정부는 ‘건전재정’이라는 기조를 내세우며 경기부양과 양극화 해소에 요구되는 재정의 역할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3년째 계속되고 있는 감세 정책으로 세수기반은 더욱 허약해져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은 줄어들고 있다.

지난 12일 한겨레와 만난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은 “우리나라의 양극화, 격차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이 심각해 사회적인 통합이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한 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고령화, 저성장 시대에는 세수 확보가 점점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이라며 “향후 증세를 하기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기에, 이미 있는 세금은 되도록 손대지 말고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용범 전 차관은 1986년 행정고시 30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재정경제부 은행제도과장,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5년동안 세계은행 선임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으며,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1년 3월 기재부 1차관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으며, 지금은 블록체인 투자업체인 해시드의 자회사인 해시드오픈리서치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코로나 위기 대응 경험, 한국 경제의 당면과제 등을 담은 ‘격변과 균형’을 썼다.

―코로나 위기 당시 기획재정부 1차관으로 위기 대응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당시 케이(K)자형 회복, 즉 회복은 되는데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코로나 위기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보나.

“사실 케이자형 회복의 시작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그때 이후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단층이 명확하게 생기고 고착됐다. 은행 절반이 망했고, 기업도 부채비율 200%를 못 지키면 가차없이 퇴출됐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지닌 분야는 더 나아졌지만, 나머지는 다 퇴장 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됐다. 그때 살아난 기업들의 수익성은 대단히 좋아졌고 글로벌 수준이 됐다. 그 이전엔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코로나 때도 마찬가지다. 유동성이 풀리면서 자산시장은 호황을 누렸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저축도 늘고 형편이 더 좋아졌다. 하지만 아래 쪽에 있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들을 비롯해 큰 타격을 입었다. 지금도 이런 양극화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첨단 기술 쪽에 이해도가 높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몫은 커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격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양극화 수준이 심각하다고 보는 건가.

“누가 봐도 심각하다. 우리가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수출도 잘 되고 있다. 우리나라 명품 시장, 수입차 시장 등을 보면 세계 3~4위 수준이다. 강남의 거리를 가보면 국민소득 3만~4만달러 나라가 아니다. 7만~8만달러 나라다. 하지만 그늘도 있다. 연봉 2천만원 정도를 받는 비정규직, 최저임금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좀 더 나은 직장을 갖고 있다 해도 부모 조력이 없으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살기가 쉽지 않다. 서울과 수도권에 인구가 밀집돼 있어 집값이 높고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그런 층이 매우 두텁다. 우리 세대 때는 출발선도 비슷했고 이렇게까지 격차가 심하지 않았는데, 한 세대만에 이렇게 된 것이다. 지금 세대는 대학진학률도 높고 욕망도 큰데, 저쪽에 보이는 삶과 자기 삶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느낀다. 이런 격차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이 심각하다. 사회적인 통합이 많이 무너지고 있다고 본다.”

―저서 ‘격변과 균형’에서 “복지 선진국과 비교하면 전반적인 소득분배 수준이나 정책의 분배개선 효과, 양 측면 모두 더 분발해야 한다”고 썼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결국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 합리적인 수준에 따라 조세 등으로 좀더 기여를 해야 한다. 상당히 운이 좋고 많이 버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내고 아래층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객관적으로 조금 더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한 성취와 관련해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모든 문제를 재정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은 재정이 중간에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교육제도 등 여러 방안을 동원해 사다리를 복원시켜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또 재정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해야 한다.”

―재정에 대해선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쪽과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쪽 사이의 입장 차이가 크다.

“재정문제는 단선적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절대 넘으면 안된다는 식의 논의는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것이다. 재정은 매우 가변적이고 구조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재정은 특히 정치행위다. 세금을 누구한테 걷느냐, 그리고 누구한테 지출하느냐 모두 아주 정치적인 행위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이고, 일종의 투쟁의 장인데, 한국에선 재정에 대해서 깊이 있는 대화가 많지 않다.”

―특히 한국경제 관료들은 재정건전성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이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규율이 무너지면 정치의 속성상 확장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재정건전성 규율이 극단적으로 무너졌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는 역사적·경험적으로 다 나와 있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같은 상황에서 재정이 튼튼했으니까 바로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다. 재정이 건전해야 할 이유는 많다. 국민연금 재정이 앞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크고, 분단 상황의 불확실성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 재정이 우량하긴 하지만 여러 우발채무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팬데믹 같은 위기 대응, 고령화 문제, 케이자형 회복 문제 등 재정에서 보듬어야 할 여러 영역이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처럼 국민연금 제도가 늦게 도입된 나라에서 연금 없이 차가운 ‘노년의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국민소득 3만5천달러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문제는 재정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재정이 그 정도의 여력은 있다.”

―현 정부는 3년째 긴축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현 정부가 대표적으로 그런 정책 기조를 설정한 거다. 정부의 정책 기조니까 그렇게 운영하면서 국회 등에서 논의 과정을 통해 거시경제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 나중에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페이스북에 “세금이 천금과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지금 서구 복지 국가들을 보면 조세 수입의 장기 안정성이 위태롭다. 고령화가 빨라지고, 생산성도 낮아지고 있다. 세입이 줄어드니까 계속 국채(나라빚)가 늘어난다. 앞으로 세입을 확보해 나가는 것은 굉장히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성장이 멈추고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는 기축통화국이라도 재정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런 시대에는 세금이 천금과 같다. 어린 시절 감자를 캘 때 나는 작고 못생긴 감자를 밭 바깥으로 던져서 버렸다. 그러면 어머님은 그걸 다시 주워오시면서 ‘못생긴 감자라도 함부로 버리면 안된다’고 타이르셨다. 세금이 못생긴 감자와 같다. 이왕 걷히고 있는 세금은 못 생기고 울퉁불퉁하더라도 가급적 손대지 않는 게 좋다. 특히 앞으로는 새로운 세금을 만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는 아직 조세부담률이 낮은 편이다. 증세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증세가 어렵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 세금을 만들고 증세하는 것, 지금 어느 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각 구성원이 자기 권리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고 각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진행될수록 증세는 어려워진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큰 진통이 따른다. 증세를 하지는 못하는데 깎아만 주면 그걸 어디서 보충할 거냐 하는 거다. 그래서 좀 미진해 보이더라도 지금 확보돼 있고 합의가 돼 있는 세금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 정부는 계속해서 감세를 추진하고 있다.

“보수 쪽에서 오랫동안 해 온 주장들이니까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는 세수를 감소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고민을 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관료 시절 가계부채 정책에 많이 관여했다. 최근 가계부채가 다시 늘고 있어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가계부채 위험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현재 가계부채가 시스템적으로 위험 요인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문제는 가계부채가 내수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가계부채의 절대 규모와 비율이 높다. 또 주요 선진국에 견줘 변동금리 비중이 크다. 팬데믹 이후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바뀐 것이 직격탄이 됐다. 우리나라는 자기 소득 중에서 빚을 갚는데 쓰는 비율(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이 높은 나라다. 소비에 돈을 쓸 여력이 없는 가계가 많기 때문에 내수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거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택시장 문제, 자영업자 문제, 양극화 문제 등이 겹쳐 있다. 재정의 보수적인 운용과도 관련이 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재정에서 해줄 영역을 한국은 각자도생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자기차입이 느는 것이다.”

―가계부채 규모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쉽지가 않다. 양극화가 단기간에 크게 나아질 가능성이 낮고, 빚을 통해서 현상 유지를 해야 하는 사람이 많다. 재정의 스탠스가 바뀌기도 쉽지 않고, 부동산 시장이 하향 안정화로 가기도 어렵다. 가계부채가 시스템 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약팽소선’, 즉 작은 생선을 굽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관리해나갈 수밖에 없다.”

―미 연준이 정책금리를 인하했고, 한국은행도 조만간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 금리가 내려가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고 보나.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이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나는 팬데믹 이후의 시기 구분을 이렇게 한다. 2020~21년은 팬데믹과 사투를 벌인 시간이었다. 2022~23년은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하면서 금리를 대폭 올린 시기다. 2024~25년은 고금리의 충격이 실물 경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라고 본다. 금리 자체는 조금 내리겠지만, 상대적 저금리이지 옛날같은 저금리 시대가 오지는 않는다. 그나마 버티던 주체들이 점점 쓰러지고 있다. 2024~25년은 기업들의 수익, 가계소득 등의 숫자들이 훨씬 나쁘게 나타날 것으로 본다. 2026년 정도가 되면 팬데믹이 헝클어놓은 이 세상에 새로운 균형의 모습이 조금 더 구체화돼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코로나 위기 당시 전국민 재난지원금, 자영업자 손실보상법 등을 놓고 기재부가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정세균 당시 국무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모피아’(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냉소적인 용어도 있다. 34년간 관료생활을 한 입장에서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보나.

“코로나 위기 당시 케이자형 중 아래쪽에 있었던 분들에게는 팬데믹이 굉장히 가혹한 위기였는데, 그분들을 우리 재정이 전반적으로 포용했느냐 물었을 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기재부 등에 대한 불만도 있었던 것이고,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예산관료들은 원래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그렇게 프로그램돼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런 관료들의 시각을 대통령이나 정치권에서 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국정이고, 나의 우선 순위에 따라서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기재부가 너무 세다’ 그런 말을 하는데, 거대한 조직인 건 맞다. 그런데 그것을 조정해야 하는 주체가 대통령이나 정치권이다. 인사권도 있고 정책 조정 기능도 있다. 관료들이 자신들의 대안을 제시하면 정치적 대안을 가지고 조율을 해서 최종안을 만들어야 한다. 관료들을 잡고 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관료들의 시각을 넘어서는 정책을 만들 수 있는 역량과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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