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각자 제멋대로의 추석

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2024. 9. 2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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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무더운 추석 연휴였다. 과거에는 추석쯤이면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 겉옷을 챙겨입곤 했던 일이 기억난다. 추석에 맞춰 가을에 입을 새 옷을 사기도 하고, 미리 사 둔 가을 외투를 처음 꺼내 입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낮에는 더워서 겉옷을 팔에 걸쳐둬야 했지만, 이번 연휴처럼 폭염주의보가 떨어진 적은 없었다. 가을 폭염이라는 희한한 단어도 처음 들어봤다. 차례 음식도 잠시 밖에 내어두었다고 금방 쉬어버렸다. 예전에는 베란다에 마련한 음식들을 밤새 두고 다음 날 차례를 지내도 음식들이 멀쩡했었는데, 더운 날씨 탓에 애써 마련한 음식이 상해버리는 추석이라니.

날씨만 변한 건 아니었다. 친구들의 추석도 날씨만큼이나 달라졌다. 친구 A는 발리로 떠났다. A는 매번 추석 연휴를 이용해 긴 여행을 떠난다.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명절 연휴가 아니고서야 긴 휴가를 떠날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여행을 연초부터 미리 계획하고 미련 없이 떠난다. 친구 B는 유럽으로 떠났다.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과 하는 여행은 가까운 국내 여행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인데, 홀로 부모님을 모시고 비행시간이 10시간이 훌쩍 넘는 여행지로 떠난다는 것이 의외였다. 아무래도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보며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가능한 한 멀리 떠나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친구 C의 추석은 조금 특별했다. 요즘 말로 MBTI가 ENFP(정열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성격 유형)가 확실한 큰아버지의 기획으로 스무 명이 넘는 가족 친지들이 한곳에 모여 이틀간 가족 운동회가 열렸다. C의 큰 아버지가 직접 작성하여 배포한 가족 운동회 계획표는 정말 대단했다. 족구부터 시작해 릴레이 공 드리블, 입김으로 휴지 멀리 날리기, 몸으로 말해요, 대망의 가족 퀴즈 대회까지. 명절마다 방영하는 ‘아이돌 육상대회’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게임 프로그램과 오래전 막을 내린 ‘가족 오락관’이 떠오르는 퀴즈 프로그램까지 정말 대단한 기획이었다. 친구 D는 반려견과 함께 휴가를 떠났다. 오로지 반려견만을 위한 여행이었다. D는 반려견이 만족스레 놀고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함께 마당에서 뛰었다.

이렇게 내 주변만 둘러보아도 명절 풍경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10년 전만 해도 친구들에게 연휴에 ‘뭐 하냐’는 질문보다는 ‘본가에는 언제 가느냐’는 질문을 훨씬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명절을 보내는 방법이 워낙 가지각색이다 보니 연휴 계획이 무엇인지부터 묻게 된다.

나는 고향인 대구에 내려왔다. 평소와 같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얌전히 차례에 따라다녔다. 많은 게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풍경도 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잘 먹고 잘 살던 내가 명절만 되면 갑자기 반쪽짜리 인간이 되는 것. 어른들에게는 나는 아직도 ‘시집’가지 않고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인생의 성과는 모자이크처럼 흐려지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4K 화질로 선명해진다. 비혼 여성에게 명절은 여전히 전쟁터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명절을 아예 피하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부딪히기를 선택한다.

사실 아무렴 상관없다. 변한 건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니까. 어른들의 공격 아닌 공격에 우물쭈물하던 어리숙한 나는 이제 없다. 더 이상 타인의 입으로 내 인생을 재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굳이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매번 싸워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젠 안다. 그 대신 나는 유유히 내 삶을 지켜나간다.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토끼 같은 내 집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가 나를 먹여살릴 내 일터를 생각하며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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