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알리체 로르바케르와 ‘거룩한 바보’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2018년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1990년대 이탈리아 농촌이 배경이다. 청년의 한밤중 세레나데에 여자들 방의 불이 켜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청혼과 수락 의식을 축하하며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함께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종일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농촌의 삶은 고되다. 확대가족 여러 명이 한집에 살며 근근이 버티는 자급자족 생활에 가깝다. 중층의 착취 구조가 드러난다. 봉건영주 격인 후작 부인이 마름을 통해 소작인들을 착취한다. 소작인들은 착한 청년 라짜로를 착취한다. 라짜로는 모두의 고된 노동 와중에 가장 많이 일한다. 쉴 새 없이 부름을 받지만 기꺼이 응한다. 할머니를 돌보고 밤새 닭장을 지킨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선함을 이용한다.
후작 부인 아들의 자작 인질극을 계기로 이 시대착오적인 마을이 세상에 알려지고 소작인들은 ‘구조’된다. 열병을 앓다 혼자 남겨진 라짜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옛 친구들을 찾아 도시로 간다. 소작인들은 홈리스가 되어 있다. 라짜로만 빼고 다들 10년은 더 나이 들었다. 철길 옆 물탱크를 개조해 생활한다. 비참함을 견딘 힘은 몸에 밴 해학과 상호 보살핌이다. 라짜로는 철길 옆에 핀 치커리를 발견하고 키워 보탬이 된다. 이들이 어느 날 교회 입장을 거부당하고 힘없이 돌아서자 교회 음악이 그들을 따라오는 장면은 동화 같지만 감동적이다.
영화 속 메타포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 화두 중 하나는 이런 것 같다. 봉건 농노의 삶과 현대 대도시 홈리스의 삶 중 뭐가 더 나을까. 민중의 삶은 결국 둘 사이에서 오갔다고 볼 수 있다. 극중 소작인들은 교회 음악을 들으며 ‘농사지을 때가 좋지 않았어?’라며 웃는다. 착취 구조를 없앤다면 이들은 도시 삶의 비참함보다 농촌 삶의 고됨을 택할 것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 <더 원더스>(2014)에도 농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보인다. 1994년을 배경으로 양봉업자 딸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왕국이 붕괴되는 과정을 그렸다. 꿀벌의 리듬에 따라 일하고, 제초제 사용에 저항하고, 농가소득을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는 아버지의 완고함을 사춘기 딸은 이해할 수 없다. 1994년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이 타결된 해로, 농산물 시장 개방은 농촌의 급속한 붕괴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농산물을 홍보해준다며 농민들에게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혀 출연시킨 리얼리티 쇼에 한사코 안 나가겠다고 버티다 딸을 이기지 못한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고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어요”라고 간신히 말한 뒤 마이크를 빼앗긴다. 극중 소녀는 자라서 이 영화의 감독이 된다. 1981년생 로르바케르가 목도한 변화는 경제적이면서 문화적이었다. 감독이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보여준 신성과 영성은 그사이 사람들을 떠나갔다.
최근작 <키메라>(2024)는 더 직접적이다. 그것은 단지 1980년대 도굴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더 큰 이야기”(감독의 가디언 인터뷰)이다. 지난 2000년간 손대지 않고 뒀던 성물을 팔아넘기는 것은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의 일부가 된 순간을 상징한다”. 그는 에트루리아 문명이 부관참시당했듯 “우리 문명을 대표하는 이 경제 시스템도 언젠가 끝날 것이고, 우리도 자본주의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라고 했다.
농촌이 도시와 공장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공동체가 파괴된 것은 사회주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산력을 중시하는 근대 산업문명을 통해서만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이념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로르바케르의 인물들이 ‘거룩한 바보’의 전통을 잇는다고 생각한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러시아 문호 솔제니친의 <마트료나의 집>이 풀뿌리 농민들이 집단농장의 타율적 노동자로 전락하며 모두가 모두에 대한 사나운 늑대가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자기희생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겸허한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고 했다.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지만, 아직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존재 덕분이다.”(녹색평론 102호)
로르바케르는 16㎜ 필름 제작을 고집한다. 무한하다는 착각을 주는 디지털화에 저항한다. 한계를 인식하고 영화를 만들어야 매 순간 충실할 수 있고 환경에도 해를 덜 끼친다는 것이다. 먼지 낀 듯 흐릿한 그의 영상은 그럼에도 아름답다. 삶의 유한성을 껴안고 절제하는 태도를 서구 동시대 예술인에게서 발견한 것은 뜻밖의 위안이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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