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선의 틈]유구한 선당후곰의 정신
부동산 불패신화 다른 이름
1가구 모집에 294만명 몰려
‘로또’보다 더한 ‘로또’ 입증
무순위 청약제도 근본 개선을
얼마 전 지인이 ‘청담 르엘’ 아파트 청약을 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만한 돈도 없지만 위치가 고민된다고 답했다. 지인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선당후곰.” 먼저 당첨이나 되고 나중에 고민하라는 말이었다.
요새 아파트 청약은 ‘로또 청약’이다. 청약 당첨은 원래 어렵다. 최근에는 억 단위 시세차익까지 거론된다. ‘진짜’ 로또가 세금 떼면 실수령액이 3억원인 경우도 있으니 청약은 ‘로또’보다 더한 ‘로또’다. ‘선당후곰’이란 단어가 생겨날 법도 하다.
‘선당후곰’은 숫자로 증명된다. 지난 7월 동탄역 롯데캐슬 무순위 청약에는 1가구 모집에 294만4780명이 신청했다. 부동산원 청약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가 세운 역대 최다 기록(101만명)도 갈아치웠다. 올해 서울에서 가장 높은 청약 경쟁률을 기록한 곳은 서울 서초동의 래미안 원베일리였다. 두 달 안에 잔금 17억원을 내야 하는데 3만명이 넘게 몰렸다. 시중에 돈이 풍부하다지만 일단 당첨되고 보자는 식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알고 보면 ‘선당후곰’의 역사는 유구하다. ‘선당후곰’ 단어 자체는 서울의 ‘마·용·성’ ‘노·도·강’이 달아오른 2020년 처음 등장했다. ‘선당후곰’ 정신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박완서가 1984년 연재한 소설 <서울 사람들>에서 주인공 혜진은 연탄을 때는 동네에서 변두리 미분양 아파트로 이사하고, 강남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한다. 접수받는 주택은행 창구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혜진은 100 대 1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다. 아파트 입찰액은 3000만원이었고, 통장에는 300만원뿐이었다. 계약은 날렸다. ‘아파트 청약 당첨=황금알’이었던 1970~1980년대 이미 ‘선당후곰’이 시작된 것이다. ‘선당후곰’은 부동산 불패 신화의 다른 이름이다.
‘선당후곰’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저 클릭 두어 번 하는 데 시간이 들 뿐이다. 문제는 클릭 한 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한 번에 10억원의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지원한다. 떨어진다고 손해보는 건 없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진하게 남는다. 불로소득만이 살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해진다. 최근 아파트들은 실거주 의무조차 없었다. 갭투자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결국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포모(FOMO·fearing of missing out)’ 심리를 키운다.
‘선당후곰’을 키운 청약 제도는 1977년 시작됐다.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공공주택에만 적용됐다. 이후 민영주택에도 도입했다.
사회적 흐름에 따라 가입 자격, 청약 순위, 납입금액 등 기준이 여러 번 바뀌었다. 공공주택의 가점·추첨제 비율이 다르고, 민영주택의 가점·추첨제 비율이 또 다르다. 지역에 따라 납입금액 등도 제각각이다. 1순위·2순위는 말만 들어도 복잡하다. 조금씩 땜질 처방을 해온 탓이다. 최근 ‘실거주 의무’가 없는 아파트 청약도 ‘예외’가 낳은 함정이다. 너무 복잡해서 책 한 권으로 설명이 될 정도다. 얼마 전 한국부동산원은 <주택 청약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펴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그 책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제도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최근 청약에는 신혼부부·다자녀·노부모 봉양 등 특별공급도 많다. 그렇다 보니 모든 세대에서 불만이 나온다. 20~30대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인데 결혼해야, 자녀를 낳아야 청약점수가 높아진다고 불만이다. 요새 커플들은 청약에 당첨되고 나서 혼인신고를 한다고 한다. 40~50대는 젊은 세대에 유리한 특별공급만 늘어 점수를 10년 모아봐야 소용없다며 억울해한다.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청약통장 해지가 늘어난다는 소식은 당연지사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로또 청약을 불러온 무순위 청약제도 개편을 검토한다고 했다. 늦었지만 문제의식은 환영한다. 이번엔 ‘누더기’ 처방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기적으로도 타당하다. 미국이 금리를 인하했다. 한국은행도 연내에 금리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의 방향성을 두고 관심이 커지는 시기다.
곧 ‘50살’이 되는 청약제도, 근본적으로 들여다볼 때가 됐다.
임지선 경제부 차장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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