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르신들의 표정에서 로컬을 읽는다

기자 2024. 9. 2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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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한 엄마는 일흔이 된 지난해 ‘프리’를 선언했다. 정년이 지나고도 계약직으로 계속 일했는데 24시간 주·야간 2교대로 운영되는 요양원 일이 힘에 부치는 시기가 왔다. 요 몇년은 한여름에도 방호복을 입고 근무해야 했고, 하루에도 몇번씩 코를 찌르는 코로나19 검사도 피할 길 없는 근무 환경이었지만 그때는 동료들과 함께 버텨내는 무언의 힘이 작용한 듯하다. 엄마는 정부에서 팬데믹 종식을 선언하고 맞은 일흔 번째 생일 무렵 퇴직했다.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내 한 몸은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며 자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일을 해볼 거라던 엄마는 찬 바람이 걷히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요양보호사로 일할 데는 많다 아니가. 일할 사람을 못 구해가 난리지.” 지역의 노인복지센터를 통해 재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2년 전 인구 3600명 남짓의 면 지역으로 귀촌했다. 전에 살던 대도시 생활권에는 차로 3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 귀촌할 때 큰 부담이 없었던 듯하다. 넉넉히 용돈 못 챙겨드리는 자식이라 죄송하면서도 시골 마을에서 혼자 지내고 계시니 조금이라도 사회활동을 하는 게 엄마에게도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식 입장에선 참 면구스러운데, 다행이라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가 여전히 쌩쌩하다는 것.

엄마가 돌보게 된 대상자는 80대 어르신 한 분과 90대 어르신 한 분. 90대 어르신은 첫인상이 아주 냉랭했다고 했다. “글쎄, 첫날 내를 딱 보고는 젊은 사람이 왔다꼬 막 안 좋다캐.” 어르신께서 너무 젊은 사람이 오면 서로 불편하다고 센터에 나이가 좀 있는 사람으로 보내달라 요청을 하셨단다. “아이고, 내가 민증까지 깠다 아이가. 하이튼 아직은 아무도 내를 칠십 넘었다고 안 본다카이.” 엄마는 젊어 보여 좋고, 어르신은 엄마가 젊지 않아 잘된 거 아니겠나.

엄마는 아침 일찍 한동네에 이웃한 두 어르신 댁을 차례로 방문한다. 오전 7시50분에 출근해 2시간30분씩, 일을 마치면 오후 1시다. 어르신들께서 오전을 선호했고, 엄마도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좋다고. 활동적인 엄마는 귀촌 후 동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함께 텃밭도 가꾸고, 야생화 그리기 수업도 다니고, 천변에서 파크골프도 친다. 그런데 재가 방문을 시작하고는 집에 와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게 된다고 했다. 생전 낮잠을 모르고 살았는데 말이다.

재가 요양보호사 일은 대상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청소·세탁·설거지 등 가사 지원, 병원 진료나 은행 업무, 장보기 등 외출이 수반되는 생활 지원, 그리고 말벗을 하며 안정적 상태를 유지케 하는 정서 지원이 주를 이룬다. 엄마가 찾아뵙는 두 어르신은 인지 활동에 문제가 없는 데다 주거 환경도 쾌적한 편이라 크게 힘든 일은 없다고 했다. 엄마를 낮잠에 들게 하는 원인은 하나, 말벗. “할매들이랑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인기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의 자리, 그 크기와 무게가 느껴진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간소하게나마 식구들 먹을 명절 음식을 장만하고선 엄마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며 음식을 싸기 시작했다. 어르신께서 추석 연휴 동안 마을 경로당이 문을 닫는다며 시큰둥해하셨다면서. 시골 마을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리하여 어느 집 자식이 경로당에 찬조를 많이 하는지에 따라 목소리 크기가 달라지기도 한단다.

요즘 ‘로컬’을 이야기할 때면 청년이 없는 게 문제고, 청년들이 와야 로컬이 살아난다고들 한다. 틀린 말이라 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청년들에게 손짓할 것인가. 지원금을 빵빵하게 주면 될까. 지금 로컬에 사는 어르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르신들이 무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청년들이 ‘아, 저 어르신들을 보니 로컬에 살며 나이 들어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야 먼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귀경길, 자꾸만 어르신들의 표정을 더듬게 됐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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