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진화는 사실이자 과학 이론이다
미국의 한 진화생물학 교과서에 실린 만평은 이렇다. 의사가 환자에게 결핵이라고 진단한 다음에 묻는다. “혹시 창조론자이신가요?” “네, 진화는 그냥 이론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의사가 답한다. “인간이 항생제로 결핵에 맞서게 된 이후, 결핵균은 웬만한 항생제에는 내성을 지니는 새로운 균주로 계속 진화해 왔습니다. 다행히 이런 내성 세균에도 잘 듣는 최신 항생제가 근래에 나왔죠. 하지만 생명은 진화하지 않는다고 믿으신다니, 값비싼 신약보다 80년 전에 처음 나온 항생제를 처방해 드릴까요?”
창조론자들은 진화는 그저 이론이라는 비판을 자주 제기한다.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0년 텍사스에서 행한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화는 그냥 하나의 과학 이론에 불과합니다. 요즘은 과학계 내부에서도 도전받고 있죠.” 창조론자들은 ‘그냥’에 방점을 찍는다. 뭔가 부족함이 있다는 암시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창조론자들은 ‘이론’이라는 단어가 일상생활과 과학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임을 은근슬쩍 악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론’은 막 던지는 추측을 뜻한다. 예컨대, “내 이론은 옥순이 상철에게 푹 빠졌다는 거야”라고 단언할 때의 그 ‘이론’이다.
과학에서 ‘이론’은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과학자들에게 ‘이론’은 ‘알려진 현상을 잘 설명하는 진술들로 촘촘히 짜인 얼개’를 뜻한다. 무엇보다도, 좋은 과학 이론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측면에 대해 검증 가능한 예측을 제공해야 한다. 1862년 찰스 다윈은 마다가스카르에서 꿀주머니의 길이가 28㎝나 되는 난초를 발견하고, 그만큼 긴 주둥이를 지닌 곤충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윈 사후에 주둥이가 그토록 긴 나방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과학 이론이 내놓은 예측들이 거듭 확인되어 방대한 양의 증거가 쌓이면, 그 이론은 당분간 ‘사실’로 인정된다. 달리 말하면, 과학자들에게 ‘사실’은 ‘더 이상 의심하면 몰상식한 사람이 될 정도로 뒷받침하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 이론’을 뜻한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을 때, 이를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었다. 오늘날 지동설을 받치는 증거는 수두룩하고,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크게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모든 생명은 아주 옛날에 살았던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 둘째, 그러한 진화를 이끈 주된 동력은 자연 선택이다. 생명의 역사가 하나의 큰 나무를 이룬다는 첫 번째 제안은 종의 지리적 분포, 흔적 형질, 상동 기관, 발생적 유사성, 수렴 진화, 화석 기록, 생화학, 분자생물학 등 어마어마한 증거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진화는 오래전부터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반면에 두 번째 제안, 즉 자연 선택을 비롯해 진화를 일으키는 기제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활발하게 연구 중이다. 흔히 일컫는 ‘진화 이론’은 주로 여기에 해당한다.
진화는 사실이다. 동시에 과학 이론이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의 증거를 다룬 책 <지상 최대의 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이론’이 사실이듯이, 녹색 식물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는 ‘이론’이 사실이듯이, 우리는 상식적으로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인다.”(28쪽) 달리 어쩌겠는가? 되풀이하지만, 진화를 지지하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진화가 사실임을 애써 부정하는 태도는 보기 민망한 탁상공론일 뿐이다. 의심하기로 작정한다면야, 진화의 모든 증거가 창조주가 꾸며낸 거대한 사기극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있겠다. 부산이 경상도에 있음은 ‘사실’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감각기관을 교묘히 조작한 허구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수 있듯이 말이다. 부산이 경상도에 있음이 사실이듯이, 진화는 사실이다.
생물 시간에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지구과학 시간에 지구가 평평하다는 이론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은 코로나나 결핵처럼 계속 새로운 변이를 만드는 감염병에 올바르게 대처할 방안을 알려주는 등 실생활에 크게 쓸모가 있다. 설사 전혀 쓸모가 없더라도, 진화 이론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 그리고 우주 어딘가에 있을 외계 생명의 존재 양식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과학 이론이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왜 애초에 자신이 존재했는지 알고 싶다면, 진화 이론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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