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불경 사서삼경 다 한마디로 하면 이웃사랑이죠”

강성만 기자 2024. 9. 2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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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평생 이웃사랑 실천한 임락경 목사
사랑방교회 출입구에서 임 목사가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사람, 임락경’(리즈앤북).

평생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온 임락경 목사 팔순을 맞아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이 임 목사에 대한 기억을 풀어낸 책이다.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과 이해학 목사, 이현주 목사, 이병철 생명운동가, 오다 코헤이 전 일본 그리스도애진고 교장 등 모두 25명의 글이 실렸다.

“튀겨서 훌륭한 사람같이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 허허.” 지난 23일 전북 정읍 사랑방교회에서 만난 임 목사에게 책이 찬사로 가득하다고 하니 나온 말이다. 도법스님은 임 목사를 두고 “아마도 천의 손, 천의 눈으로 뭇 생명을 돌보는 관세음보살 (…) 무애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천촌만락을 누비고 다녔던 원효대사의 살림살이하고 제법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고 썼다. 도법스님에게도 잘 써달라고 부탁했냐니 임 목사는 이번에는 “스님이 나를 잘 모른 거죠”라며 즐거워했다. 임 목사의 절친 이현주 목사는 “전라도 촌놈 임락경은 아무리 봐도 이 시대의 에피파니다”라고 쓴 뒤 주를 달아 에피파니는 보통 ‘신의 현현’으로 번역되는 모양이라고 보탰다.

흥이 넘치고 유쾌한 임 목사의 팔순잔치는 그가 건강교실을 운영하는 사랑방교회(8월17일)와 거주지인 강원 화천 시골교회(7월20일) 두 군데에서 열렸다. 그를 따르는 제자모임인 촌돌(회장 박승규 해남신기교회 담임목사) 회원들이 나서 꾸렸다. 화천 잔치는 그가 오랜 기간 돌봐온 장애인 부부 결혼식을 겸했고 약 350명이 참석한 정읍 잔치는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사진을 찾기 힘든 옛 잔칫상 재현에 공을 들였다.

“예전에 환갑이나 칠순 잔칫상을 차릴 때 음식을 위아래로 한자, 30㎝씩 쌓았어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우리 전통문화가 사라졌다는 것도 몰라요. 이번 상차림 준비에는 잣이 가장 힘들었어요. 사람들과 둘러앉아 잣에 일일이 이쑤시개를 꽂아 쌓아 올렸죠. 잔칫상을 보고 (참석자들이) 너무 좋아해 서로 갓 쓰고 잔치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 오후 시간이 다 갔어요.”

‘사람, 임락경’ 표지.

임 목사는 맨발의 성자로 불리는 이현필(1913~64) 선생이 세운 광주 무등산 동광원에서 15년가량 결핵 환자를 돌봤고 80년대 이후에는 30년 동안 화천 시골교회에서 장애인과 의지할 데 없는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동생활을 했다. 장애인 돌봄 국가 복지 체계가 확립된 뒤로는 장애인들을 가족 품과 기관으로 떠나보내고 건강교실 운영과 강의에 힘을 쏟아 왔다. 유신 시대인 70년대 후반에는 경기 양주 장흥에 집을 짓고 해고 등으로 생계가 막막한 노동자들을 품어주기도 했다. “해고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도 우리 집에 몰려 왔죠. 많을 때는 40명까지 함께 살았어요. 복직하고 떠나는 사람이 쌀 한 가마씩 사주고 가면 그걸로 밥해 먹고 반찬은 내가 농사짓는 거로 해결했어요.” 유희영 전 군산와이엠시에이 사무총장은 ‘사람, 임락경’에서 ‘장흥 시절 임 목사는 노동자들이 결혼하게 되면 예식 준비는 물론 손수 바느질해 이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임 목사는 사랑방교회에 딸린 밭에서 직접 녹두를 재배한다. 강성만 선임기자
임 목사 팔순 잔칫상. 임락경 목사 제공

전북 순창에서 난 임 목사의 공식 학력은 초교 졸업이다. 평생 농사꾼이 되기로 맘먹은 그는 16살에 동광원에 들어갔다. “북에 남강 이승훈이 있다면 남에는 이현필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다석 유명모 선생의 말을 어려서 듣고, 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는 자신이 동광원에서 결핵에 걸리지 않고 군대에 갈 수 있었던 게 기적이라고 했다. “450명 결핵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거든요. 1960년대는 결핵은 암보다 더 무서웠어요. 전염성 때문이죠. 일주일에 평균 두 명은 죽었어요. 처음에 죽을 때는 찬송가도 부르고 관을 썼지만 나중에는 너무 많아 헌 가마니에 싸서 묻었죠. 모내기하다 하루 세 명 묻은 적도 있어요.”

캐나다에서 사는 막내딸 들래씨는 이번 책에 “아버지는 늘 ‘나의 행복을 좇아가는 삶은 즐겁지만,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은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썼다.

팔순 맞아 도법스님, 이해학 목사 등
25명 공저한 ‘사람, 임락경’ 나와
결핵환자 15년·장애인 30년 돌보고
유신 땐 해고노동자들 품어 살기도

장애인·병자 함께 살며 건강에 관심
음식과 땀으로 독 빼는 건강교실 운영
“땀 흘려 일한 흥부처럼 살면 건강해”

임 목사는 지금도 잠을 잘 때는 늘 핸드폰을 머리맡에 두고 자동차 기름은 채워졌는지 확인한단다. “밤중에 오는 전화는 꼭 받아요. 급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전화이니까요. 음식을 잘못 먹고 체한 사람들이 많아요. 직접 가서 손으로 쓸어내려주기도 합니다.”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몸이 안 좋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전화가 왔다. 장애인·병자들과 살면서 본격적으로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그가 한 달에 한 번 2박3일씩 운영하는 자연건강 교실은 건강을 지키는 음식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독출한뇨(毒出汗尿)’. 몸 안의 독은 땀과 오줌으로 빼야 한다는 뜻인데 보통 15명 정도 참가하는 건강교실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말이다. “이 말 한마디 하려고 내가 태어났어요. 내 묘비명으로 새기려고 해요.”

건강교실 참가자들은 임 목사가 사랑방 교회에 딸린 밭 3천평에서 손수 유기농으로 재배한 녹두로 만든 죽과 도토리묵을 먹고, 백토를 사용한 온돌 찜질방에서 땀을 흘린다. 참가비는 20만원인데 돈이 없다고 하면 받지 않는단다. 건강교실 자원봉사자도 15명이나 된다. 그는 장애인과 공동 생활을 할 때도 유기농 농사로 직접 지은 식재료로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건강 식단을 꾸렸다.

임 목사는 흥부와 심청 아버지를 끌어와 자신의 건강 지론을 설파했다. “놀부는 쌀밥에 고기 먹고 일을 안 해 몸이 좋지 않았어요. 반면 고기 안 먹고 잡곡밥 먹고 땀 흘려 일한 흥부는 병이 없어 아들딸을 많이 낳았어요. 흥부처럼 살아야 병이 없습니다. 심청 아버지가 왜 눈을 떴는지 아세요. 한성 잔치 가려고 천 리 길을 얻어먹으며 걸어가서죠. 살던 마을에서 대접받으며 있었으면 절대 눈을 뜨지 못했을 겁니다.”

임 목사가 한옥으로 지은 사랑방교회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해방둥이인 임 목사의 일상도 땀 흘리는 삶이다. 농사로 바쁠 때는 몸이 땀에 흠뻑 젖어 하루 네 차례 목욕한단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화천과 정읍을 오가는데요. 한 번 갈 때 쉬지 않고 여섯 시간 운전해요. 그 시간에는 이 나이에 이렇게 운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쾌감이 생기더군요.”

‘사람, 임락경’에는 임 목사가 노래 가사를 외우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며 천재가 틀림없다는 찬탄도 나온다. 실제 그는 12절로 된 해방가 등 자신이 외우는 노래 가사들을 풀어 2005년에 ‘촌놈 임락경의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삼인)이라는 책도 냈다. ‘천재 맞느냐’고 하자 그는 “난 노력형”이라고 받았다. “제가 장애인들이랑 수십 년 살았잖아요. 그때 보니 다들 누구도 못 따라오는 특징 한 가지씩은 있어요. 한 장애인은 수많은 전화번호를 띄어쓰기 하지 않고 숫자만 쭉 적어놓고는 누구에게 전화하라고 하면 귀신같이 찾아서 해요. 어떤 장애인은 자기 이름도 못 쓰면서 도자기를 만들어 대상만 여러 번 받았어요. 나는 노래 가사를 많이 아는 특징이 있을 뿐이죠.”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스승으로는 이현필 선생과 최흥종(1880~1966) 목사, 유영모(1890~1981) 선생을 꼽았다. “서양 의술로 동양 사람을 고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은 최 목사에게 배웠어요. 그분으로부터 건강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실천이나 이웃사랑 문제는 이현필 선생이죠. 철학이니 고상한 생각은 유영모 선생에게 배웠습니다.”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1982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강의할 때이죠. 내가 초등학교만 나와 중학교 간 친구들이 놀아주지도 않았는데요. 대학 강단에 섰으니 새 역사를 창조한 거죠. 그때 대학생들에게 농촌봉사활동이란 말에서 봉사를 빼라, 그리고 농촌활동 가서 농민들에게 밥 시켜먹지 말라, 한 농촌 마을에 5년은 가라고 했는데 나중에 그대로 다 되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왜 이웃사랑이 중요한지 물었다. “내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봤는데요. 딱 한마디입니다. 바로 자비심이죠. 유교의 사서삼경은 ‘어질게 살아라’이고요. 구약을 보면 모세 십계명 중 셋은 하나님 사랑, 일곱은 이웃사랑입니다. 그게 너무 길어 합치려 예수가 왔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이고,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하는 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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