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다움’은 사절합니다 [똑똑! 한국사회]
조기현 | 작가
친척을 만나지 않는 명절을 보낸 지 오래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아프면서 교류는 끝이 났다. 잘사는 집은 먼저 연락을 끊었고, 못살고 뿔뿔이 흩어진 집은 잠적하듯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게 참 좋았다. 피만 조금 섞였다 뿐이지, 남이나 다를 바 없는데 만나서 ‘가족다움’을 흉내 내야 하는 게 늘 버거웠다.
이번 명절에는 엄마를 만났다. 때때로 설이나 추석 때 식사를 한번씩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엄마의 애인과, 그의 아들까지 함께 만났기 때문이다.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만나서 시간을 허비하지?’, ‘가족 시늉을 해야 하는 거 아냐?’, 마음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몇개월 전부터 엄마와 애인이 번갈아 계속 제안했기에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복잡하게 어질러진 마음을 ‘두 사람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지런히 정리해 나갔다. 이렇게 만나자는 제안 자체가 두 사람이 관계의 확신이 생겼다는 징표라고 여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사람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만났다고 했다. 엄마는 안전을 확인하는 신호수였고, 그는 기술자였다. 현장에서 매일매일 마주쳤지만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가진 적은 없다. 서로 일로 소통해야 했기에 번호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건물이 다 세워지니 각자 또 다른 건설 현장으로 흩어졌다. 교류 없이 1년 정도 지내다가 그가 먼저 연락해서 고백했다고 했다. 이혼 뒤 몇번의 연애가 상처를 남겼고, 갑작스러운 사별 후 온전히 애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마음들을 배려하며 몇년을 잘 만났다. 지금은 함께 살아간다. 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어느 지역 소도시로 향하는 동안, 만남이 부담스러워 스트레스에 짓눌리다가도 그들의 만남을 떠올리면 애틋함으로 마음이 펴졌다.
엄마와 애인, 애인의 아들과 나. 서로 둘러앉은 식사 자리는 예상대로였다.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고, 어색한 공기를 순환시키려고 꺼낸 말은 한두 마디 오가다가 뚝 끊겨버렸다. 애인은 아들이 늦둥이라고 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나마 서로 노력하며 그와 조금씩 대화를 이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빨리 어른이 돼버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취업해서 돈을 벌겠다고 했다. 지금도 군대에 가는 대신 대체복무로 돈을 벌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지역에 남아서 살아가고 싶다고,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피시방이나 노래방에 가는 게 가장 재밌다는 청년이었다. 그의 미래 전망이 안정될 수 있길,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됐어도 자신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고 잘 살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모든 마음이 진심이었는데도 함께한 시간 속에서 느낀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해체됐던 가족을 다시 조립하고 복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명절다움’을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나에게 ‘첫째 아들’이라는 어떤 각본이 있는 건 아닌지 자꾸 두리번거렸다. 마치 내가 숙지하지 못한 이 역할의 대사나 지문이 있는 것처럼 허둥거렸다. 아주 오랫동안 명절마다 나는 늘 ‘개인’이었는데, 오랜만에 ‘가족’에 끼워 맞춰지니 낯설기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잘 적응해 가겠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편함을 잘 지켜 나갈 생각이다. 왜 명절을 꼭 ‘가족처럼’ 지내야 하는 것일까? 가족이 해체되고 고독사가 만연하고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명절은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명절을 지낸 이후, 일주일 동안 만난 동료들의 모습도 많이 갈렸다. 누군가는 많은 혈연들을 만나고 노동하느라 지쳐 있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데 온갖 미디어에서는 가족 이야기만 해서 외로웠다고 했다. 가족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많은 이들이 소외되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이 아닌 다른 공동체성을 감각할 수 있는 명절, 지금 시대에 더 어울리는 의례를 상상해 보면 어떨까? 돌아오는 설에는 다른 명절을 좀 기획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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