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평북 위안군의 대참화(慘禍), 국경 지역의 가련한 동포들

2024. 9. 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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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日警, 독립단에 밥 줬다고 고문하고 학살 방 안에 가둬놓고 불 질러 여섯가구 몰살 재 속의 뼈다귀에선 서러운 눈물만 흘러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 가련한 조선 백성

100년 전 중국과 국경을 맞댄 평안북도 지방에선 독립군과 일본 군·경과의 충돌이 자주 있었다. 그 충돌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이는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그곳의 백성들이었다. 그 참담한 모습을 찾아 떠나보자.

1924년 9월 대참사가 평안북도 위안군에서 발생했다. '천통지곡(天痛地哭)할 국경 대참사 사건'이라는, 제목도 무시무시한 기사가 1924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기사는 "지난 8월 11일 밤중에 평북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 무장한 사람들에게 한 동리 6호가 불에 태워 전멸을 당하고 가족 8명이 일시에 학살된 전시(戰時)상태 이상의 궁경(窮境)에 빠진 국경의 가련한 동포를 생각하고 이 소식을 전한다"로 시작된다.

기사는 계속된다. "8월 7일 오전 6시경에 그 동리에서 약 25리 쯤 되는 곳에 있는 화창면 주재소를 독립단이 습격하려다가 중지하고 약 25명이 신흥동으로 올라가서 동리 송지항(宋芝恒)의 집에서 점심을 해 먹고 동리 최응규(崔應奎)의 집에서는 저녁밥을 지어 먹고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 이튿날 새벽에 죽내(竹內) 평북 경찰부장과 이달(伊達) 경부보가 인솔한 경관대 40여 명이 돌연히 그 동리로 달려들어서 피해를 당한 여섯 집을 에워싸고 집안 식구를 모조리 잡아내어서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독립단이 갈 때에 밥을 해 먹었다는 말을 경관에게 하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걱정으로 사실을 말하기도 난처하여 누구나 용이하게 자백하지 아니 함에, 필경은 고문을 하기 시작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형을 하다가 그 아래 마을에 사는 전모(全某)의 집에서 점심을 시켜 먹고 신흥동에서 약 15리 가량되는 '다락말'로 내려가서 박모(朴某)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김응채(金應彩), 전명길(全明吉), 김창성(金昌盛), 최응규(崔應奎), 송지항(宋芝恒), 이창섭(李昌涉) 등 여섯 사람을 불러 내어 밤을 새워 가면서 악형 고문을 한 결과, 그들도 필경 매에 못 견디어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이 있다'고 자백하였으므로 그 이튿날 즉 9일에는 일시 방송(放送)되어 각각 집에 돌아와 있던 중에, 11일 밤에 귀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참화를 당하였다 한다."

이 참화로 6호가 전소(全燒)됐고 28명이 소사(燒死)했다. "김응채(金應彩)의 2살 손자 포함 가족 8명 소사, 전명길(全明吉)의 가족 2명 소사 2명 불위불명, 이창섭(李昌涉)의 가족 4명 소사, 최응규(崔應奎)의 가족 6명 소사, 송지항(宋芝恒)의 가족 4명 소사, 김창성(金昌盛)의 가족 4명 소사, 그 외에도 가축과 곡식이 전부 소실되어 물질적 손해도 수천 원에 달하였다. (중략) 사건이 발생된 신흥동은 첩첩산중으로 울창한 숲속에 게딱지 같은 집을 세우고 산비탈의 손바닥만한 화전에 생명을 이어가는 극히 빈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간 벽촌이었다. (중략) 사람이 가장 많이 타죽은 김응채의 집터에는 타고 남은 사람의 뼈마디가 아직도 재 속에 섞여 마른 뼈다귀에서 서러운 눈물이 흐르는 듯하였고, (하략)"

요행히 참화를 피한 송지항의 15세 된 딸은 기자에게 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8월 8일에 40여 명의 경관대가 신흥동을 에워쌀 때 우리 집에도 들어와서 우리 집 가족을 일일이 악형(惡刑)하다가 마침내 나까지 잡아내어 옷을 발가벗긴 후 함부로 때리면서 독립단에게 밥을 해 먹인 일이 있느냐고 물으나 철모르는 나로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종시 모른다고만 한 즉, 나중에는 나의 국부에 돌을 집어넣는 등 별별 악형을 행하므로 견디지 못하여 혼도(昏倒)하였다가, (중략) 사건 발생 당시에 불 속에까지 들어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최흥주(崔興周)는 말하되 '그날 밤 12시쯤 되었을 때 어떤 무장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식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라 한 후, 각각 목과 손발을 잡아매어 방안에 모아놓고 집에 불을 놓습디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본 즉 손목에 매인 노끈이 끊어지기에 목과 발을 풀고 도망하였습니다. 집 밖에 나와보니 다른 집들도 화광(火光)이 충천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묶어놓고 불을 놓아서 금방 죽을 지경이기에 나도 함께 죽여달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총으로 나의 배를 막 쑤셔서 불 속에 넣었으나 다행히 불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나중에 정신을 차려서 현장을 벗어나서 배가 뚫려서 창자가 나온 줄도 모르고 도망하였습니다."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판단은 창천(蒼天)과 독자의 몫"이라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종합해 보면 적어도 수십 명이 들어와서 한 집에 몇 명 씩 나누어 맡아 가지고 가족을 결박해 한 곳에 모아놓고 불을 살라서 죽인 것이 분명한데, 경관 측에서는 독립단의 소행이라며 사실을 전혀 부인하는데, (중략) 잔인 포학한 이 사건이 발생한 후로는 촌(村)에서 살다가 그와 같은 변이나 만나지 않을까 하여 점차 성내(城內) 같이 사람이 좀 많은 곳으로 모여드는 중이요, 농촌은 점점 피폐만 해 갈 뿐이다."

이런 국경 지역 가련한 백성에 대한 염려는 그전부터 계속 있어 왔다. 염려는 현실이 되어 형용할 수 없는 참상이 이어졌다. 다음은 1923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사설이다. "국경 방면에는 때때로 무기를 가진 독립단이 침입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이 무장독립단과 일본 경관이 싸우는 사이에 죄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지방 주민은 지레 죽을 지경이다. 독립단이 왔을 때에 수응(酬應)을 아니 할 수도 없고 수응한 후에는 일본 관경(官警)은 검거 취조하여 평북 위원군에서는 자살한 사람까지 있다 한다. 다시 얻을 수 없는 생명을 제 손으로 끊을 때에 오직해야 그랬으랴. 우리는 찬 밤에 고통과 추위를 못 이겨 목매 죽는 가련한 동포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하나님이시여! 이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가련한 조선 백성을 당신은 어찌 하시렵니까? 오! 그들을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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