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민원사주 공익신고자들의 ‘용기’
1992년 3월 14대 총선을 앞두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 이지문 중위는 서울 종로구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데모 한 번 안 한 그였지만, 부재자 투표에서 무조건 1번을 찍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빼앗거나 불이익을 주라는 상부의 노골적 지시를 따를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그의 용기 덕에 군 부재자투표가 영외 투표로 바뀌며 부정선거를 차단하는 발판이 마련됐다. 정작 그는 헌병 조사와 영창생활을 하다 그해 5월 이등병으로 파면됐고, 삼성그룹 사전 채용이 취소된 후 직장도 구할 수 없었다.
평범한 시민이 경험하고 목도한 권력의 부정·비리를 폭로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고발한다’란 공개선언문으로, 120년 전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 간첩 조작 사건을 비판한 대문호 에밀 졸라마저 투옥과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내부고발자나 공익제보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어둠을 뚫고 나오는 양심의 소리는 새벽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민원사주’ 의혹을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한 방심위 직원들이 25일 직접 신원을 밝히고 공익신고에 나선 이유를 증언했다. 지경규 지상파방송팀 차장, 탁동삼 명예훼손분쟁조정팀 연구위원, 김준희 언론노조 방심위지부장이다. “직업인이기에 위원장 비리를 알리는 것은 두려웠지만, 심의기구 직원으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이 떠올랐다”는 탁 위원 말이 숙연하다. 이들은 공익신고자 색출·탄압 대신 민원사주 의혹에 대한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다.
권력이 국정 난맥상을 감추고 덮으려는 ‘입틀막’ 시대지만, 시국선언과 공개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일엔 학계·종교계·시민사회계 원로 1500명이 참가한 ‘전국비상시국회의’에서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의료대란과 ‘뉴라이트’ 인사 중용, 언론 장악 시도 등을 비판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신을 향해 외친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박재현 논설위원 park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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