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레즈비언 공동체 이야기가 일깨운 것

한겨레21 2024. 9. 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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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가 무섭다.

지브이(GV)에서 자신을 레스보스섬에서 나고 자란 주민(레즈비언)이자,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인 "더블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한 감독은 영화에서 직접 경험하고 성찰한 것을 보여준다.

낯선 이주민들을 알게 되고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고, 그들이 행복한 것을 보고 나도 행복하려 노력했다고 말하는 여성 주민들의 말을 들으며 서로의 삶을 존중할 때 다양성은 역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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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나는 바다가 무섭다. 몸집을 키우며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거기에 휩쓸려 사라질 것 같은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큰 물 속에 몸을 온전히 담그고 머무를 수 있다면 겁이 덜 나지 않을까 해서 수영을 배웠다. 한팔접영을 배울 즈음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돼 수업이 취소됐다. 다시 물로 돌아가지 못했고(수강신청이 매우 힘들다), 바다는 여전히 무섭다.

“더블 레즈비언”의 다정한 시선

그런데 여름 끝자락의 바다로 당장 뛰어들고 싶게 한 영화를 만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레스비아’(젤리 하드지디미트리우 감독, 2024)다. 1970년대부터 유럽 곳곳의 레즈비언이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의 고향인 레스보스섬으로 모여든다. 섬의 서쪽 에레소스 마을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며 먹고 자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친구가 되고 사랑을 나눈다. 대부분 나체로 말이다. 성적 지향을 감추고 살던 이들이 이 디아스포라의 해변에 이르자마자 옷부터 벗어던진다. 서로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기도 한다. 옷과 머리에 담긴 정상성 규범들로부터 해방된 이들은 여성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안팎의 시선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진다. 어떤 두려움 없이, 손잡고 춤추듯 물속을 누비는 이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해방감이 스크린을 뚫고 내게 전해졌다.

영화는 에레소스 해변에서 시작된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이후 40여 년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며 변화해가는지를 특히 레스보스섬 선주민과의 관계에 주목해서 그려낸다. 지브이(GV)에서 자신을 레스보스섬에서 나고 자란 주민(레즈비언)이자,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인 “더블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한 감독은 영화에서 직접 경험하고 성찰한 것을 보여준다. 아름답고 쓸쓸한 섬의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을 모두 사랑하는 그의 시선은 참 다정하고 섬세했다.

영화는 주민과의 갈등으로 해변에서 쫓겨난 레즈비언들이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로서, 집과 땅과 상점의 소유자로서 지역사회에 자리잡는 과정에 담긴 자본주의적 딜레마도 질문한다. 해변에서 광장과 마을로 들어온 시간이 쌓이는 동안 이들은 버려진 집과 밭과 동물을 돌보며 주민들과 이웃으로 어울려 살아간다. 차차 “정체성이 아니라 행동으로” 평가되고, “집단을 넘어 개인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낯선 이주민들을 알게 되고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고, 그들이 행복한 것을 보고 나도 행복하려 노력했다고 말하는 여성 주민들의 말을 들으며 서로의 삶을 존중할 때 다양성은 역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레스보스 공동체 40년사가 일깨운 것

극장을 나오며, 친구는 에레소스 해변의 풍경을 두고 “나체가 해방이야?”라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른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자주 꾸는 악몽 중 하나가 학교나 일터에 갔는데 상의나 하의, 혹은 둘 다가 사라져 있는 상황인 걸. 해방감은커녕 수치스럽고 망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미 악몽이 현실이 된 날들을 살고 있기도 하다. 비로소 심각성이 인지된 딥페이크 범죄가 만연한 곳이 내가 사는 현실이다. 여성의 수치심을 볼모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범죄의 그물망을 조직적, 산업적으로 확대해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꿈꾸는 해방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어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어떤 일상일까?

영화를 본 직후엔 나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살아갈 곳은 그리스가 아닌 한국이며, 에레소스의 레즈비언들이 긴 시간 삶을 통해 만들어낸 변화를 내가 거저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픈 진실이다. 멀리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기쁨 말고, 지금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원한다. 감독이 친구들과 함께 모은 방대한 기록을 집요하게 편집해 소수자 공동체의 역사 쓰기를 해내려 한 이유도 이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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