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른자·물이 흐르는 기괴한 춤판···‘비인간’과 뒤섞이는 몸을 말하다

백승찬 기자 2024. 9. 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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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김보라 ‘내가 물에서 본 것’
시험관 시술 경험 돌아보며 창작
“변형된 몸을 인정하는 것이 원형을 말하는 길”
안무가 김보라씨가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 N스튜디오 연습실’ 에서 10월 공연을 앞둔 <내가 물에서 본 것>에 출연하는 무용수들의 안무를 지켜보고 있다. 2024.09.10 /서성일 선임기자

기괴하다. 지저분하다. 징그럽다. 무용수들은 입안에 가득 머금었던 물을 바닥에 조금씩 뿜거나 흘린다. 침, 땀과 같은 체액이 물과 섞여 바닥에 흐른다. 높은 점프나 현란한 턴 같은 기예는 선보이지 않는다. 대신 관절을 뒤틀거나 무용수들끼리 한 몸인 듯 엉켜 인체의 가동범위를 탐구한다. 동물이 서로를 인식하듯 체취를 맡거나, 상대의 팔을 깨물어 어딘가로 데려가기도 한다. 달걀 한 판을 머리에 올리고 걷더니 몇 개를 바닥에 떨어트려 깨트린다. 흐르는 노른자 사이 무용수의 걸음이 아슬아슬하다.

국립현대무용단 신작 <내가 물에서 본 것>의 연습 현장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예술감독·안무가인 김보라(42)의 작품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내 국립예술단체 N스튜디오 연습실에서 만난 김보라는 인터뷰 내내 “환경에 따라 변하는 몸, 그 변형된 몸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원형을 말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이야기했다.

“표현은 추상적이지만 접근은 구체적”이었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김보라의 개인적 체험과 관련 있다. 김보라는 과거 3년 동안 12차례의 시험관 시술을 경험했다. 그 3년간 김보라는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했다.

“안무하며 ‘원래의 몸’을 찾으려 했는데, 시술 이후엔 ‘원래의 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둘러싼 환경과 제 몸을 돌아보고, 의사와 소통하고, 그렇게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 안무 같더라고요.”

병원 대기실엔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흘렀지만, 막상 진료실에 들어가면 단조롭고 으스스한 기계음만이 깔렸다. <내가 물에서 본 것>에도 객석에는 클래식 음악이, 무용수가 서는 무대에는 기계음이 들린다. 무용수는 기계음, 물 뱉는 소리, 몸동작에서 나는 소리 등을 섞어 들으며 움직인다. 몸의 단일성, 시간의 단일성은 이런 방식으로 흐트러진다. 김보라는 춤 동작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대신 ‘무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동하기’ ‘물을 머금고 뒷걸음치기’ ‘체액을 물과 섞어 배출하면서 위치 확인하기’ 등 무용수들에게 수십 가지 약속을 익혀달라고 요구했다. 무용수들은 이런 약속을 지키면서 우연성에 기댄 동작을 선보인다. 그러므로 3회의 공연 동안 세부 동작은 조금씩 달라진다.

안무가 김보라씨가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09.10 /서성일 선임기자
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 연습 장면. ⓒ목진우
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 연습 장면. ⓒ목진우

시험관 시술이라는 안무가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참여하는 무용수 13명 중에는 남성이 더 많다. “이질적이고 혼합적이고 다중적인 몸”이라는 개념에는 시험관뿐 아니라 철심, 임플란트, 렌즈도 포함된다. 김보라는 “제가 바라보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되돌아보는 태도”라고 말했다.

“몸이 환경적으로 변화하고 혼합되는 것을 인정한다면, 무엇이 들어와도 함께할 수 있겠죠. 심지어 미생물도 우리 몸과 함께하고 있어요. 진료실에는 ‘이걸 인간 몸에 쓰나’ 할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기구도 있어요. 그걸 비판적으로 보기보단, 결국 우리는 그것들과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징그러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새롭다고도 말할 수 있고요.”

결국 김보라는 몸을 활용하는 데 가장 능숙한 무용수들을 통해 몸의 대단함이 아니라 몸의 취약성을 말한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휴머니즘’을 넘어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포스트휴머니즘’을 말한다. 작품 제목의 ‘물’은 ‘水’가 아니라 ‘物’이다.

김보라는 7세 때 부모의 권유로 무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춤추는 것도 좋았지만, 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실기 전공으로 입학했으면서도 창작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는 “몸으로 하는 일에 세상 모든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2013년 창단한 자신의 예술단체를 ‘무용단’이 아니라 ‘아트프로젝트’라고 명명한 것도 춤의 영역을 넓히거나 넘어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물에서 본 것>도 포스트휴머니즘 전공자, 과학기술 연구자와의 중장기 리서치를 하며 구성했다. 발달장애인 움직임을 위한 프로그램, 메타버스를 활용한 융합예술교육 프로젝트를 만들었던 아트프로젝트보라는 최근 ‘창작자의 비대면 공동 협업을 위한 가상공간’인 ‘코레오-그래피 앱’도 선보였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안무가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 않고도 협업할 수 있고, 관객들도 그 과정을 알 수 있다. 관객과의 대화, 예술 교육, 무용 커뮤니티 모두를 위한 도구다.

이 작품은 10월17~19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선보인다.

안무가 김보라씨가 1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 N스튜디오 연습실’ 에서 10월 공연을 앞둔 <내가 물에서 본 것>에 출연하는 무용수들의 안무를 지켜보고 있다. 2024.09.10 /서성일 선임기자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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