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86세대의 타락[신보영의 시론]

2024. 9. 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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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정치부장
16대 총선 때부터 정치권 진입
주류 되고도 80년대 사고 여전
김민석 ‘이재명 사수대’ 선봉
임종석은 北 동조한 두 국가론
민주당내 계파적 질서에 앞장서
진짜 정치 복원이 해야 할 임무

2000년 제16대 총선의 키워드는 86세대(1960년대 출생·1980년대 학번)였다. 1990년 20대 후반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 김민석 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재선에 성공했고, 1999년 11월 김대중(DJ) 당시 대통령이 영입한 임종석 전 민주당 의원이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샛별’ 같은 등장 이후 노무현·문재인 정부라는 2번의 집권 역사를 만들어낸 86세대는 이제 한국의 주류다. 당장 올해 4·10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300명의 반을 넘는 178명이 1961∼1969년생의 86세대다. 이 중 민주당 86세대 의원은 117명에 달한다.

대표적 인물인 김민석 최고위원과 임종석 전 의원의 최근 행보를 보면, 앞으로도 정치적 경쟁력과 효용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먼저,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총학생회연합 의장을 지내며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김 최고위원은 윤석열 정부가 계엄령을 준비한다는 근거 없는 유튜버 주장의 ‘확성기’ 역할을 자처했다.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선 ‘계엄령 예방법’을 발의하면서 국무총리 등이 대통령에게 채상병·김건희 특검법 등에 대해 “거부권을 건의한다면 노골적인 계엄 의지 표현”이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내놓았다. “법안 발의 과정과 핵심 내용에 대해 이재명 대표와 공유해 왔다”고도 했는데, 계엄령 임박설 주장이 이재명 방탄용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처럼 들린다. 정치적 부침 속에서 재비상을 위해 ‘이재명 사수대’의 선봉에 서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수석최고위원 당선을 도운 이 대표에 대한 충성심인가.

임종석 전 의원의 ‘남북 2국가론’ 주장도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19일 “현시점에서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이라면서 남북 2국가론을 처음 언급한 데 이어, 23일에도 페이스북에 “통일을 봉인하고 2국가 체제로 살면서 평화롭게 오고 가며 협력하자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얘기인가”라고 적었다. 북한이 올 초부터 제기하는 ‘남북 적대적 2국가론’에 동조하는 것도 문제지만, 북한이 지난 13일 핵무기를 연간 최소 10개를 제조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할 정도로 남측에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임 전 의원이 말한 ‘남북 평화적 2국가론’이야말로 현실성이 극히 떨어진다. 2020년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통일운동에 매진할 것”이라고 약속을 했던 임 전 의원의 현실 인식이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관심을 끌기 위한 ‘도발’ 전략인가.

두 사람에겐 1980년대 학생운동 시절처럼 아직도 거악(巨惡)이 필요한 듯하다. 하지만 투쟁 대상을 잘못 잡았다. 김 최고위원이 겨냥한 윤석열 대통령은 ‘불통’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비견할 만한 ‘거악’은 아니다. 선거라는 정당한 절차를 거친 합법적 대통령으로, 국정 운영이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되면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게 공당의 정치인이 할 일이다. 임 전 의원이 싸워야 하는 거악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어야 한다.

임 전 의원과 함께 1999년 정치에 입문했던 우상호 전 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발간한 저서 ‘민주당 1999-2024’에서 ‘총론으로 보자면 그룹으로서의 86세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국민은 86세대가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문법을 사용하면서 86세대만의 색깔을 끝까지 지켜주기를 기대했지만, 86세대는 ‘오히려 민주당 계열의 계파적 질서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지금 김 최고위원과 임 전 의원의 행보가 딱 그런 모양새다. 존재하지도 않는 거악을 상정해 80년대식 사고에 갇혀 있는 것도, 이재명 일극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당내 민주화에는 무관심한 것도 문제다.

지금 86세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진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공통의 도전을 발견하고, 협의와 중재를 통해 국민을 편안하고 부강하게 하는 정치를 하라는 게 DJ가 86세대를 대거 영입한 이유였을 것이다. 86세대의 경험은 극단적 주장과 분열이 난무하는 현재의 정치를 극복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86세대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무장해 공통의 과제에 대한 집단적 합의를 바탕으로 더 치열하게 활동해주기를 바란다”는 우 전 의원의 조언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신보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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