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돼지 메뉴 통일, 부장님 회식?…“우리 한 대표”는 직접 말도 못 해
여의도 정치권에선 우르르 모여 밥 먹는 것을 보통 떼밥이라 부른다. 현안을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보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친교의 자리인 경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할 ‘9월24일 용산 대통령실 만찬’ 참석자들의 설명은 제각각이었다. 대통령실은 “화기애애”, 친한동훈계는 “맹탕이라 국민에게 맞아 죽겠다”, 친윤석열계는 “밥은 원래 그런 거다”라고 했다.
두 달 전 만찬 메뉴로 ‘삼겹살’을 먹으며 겹겹으로 하나가 되자고 했던 당정이었는데, 이번 만찬은 입맛 다른 이들을 소·돼지로 메뉴 통일시킨 ‘부장님 회식’ 같았던 자리인 셈이다. 만찬 직후 쏟아진 ‘용산 분수정원 식당 후기’를 보면 과연 다음 회식이 가능한지도 가늠할 수 없는 분위기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이 참석한 만찬이 끝난 직후 서면 브리핑을 했다. “당 지도부를 격려하고 화합을 다지는 만찬이었다” “참석자들은 대통령이 도착하자 모두 박수를 보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만찬 자리에서 여야 관계, 국정감사, 체코 방문, 원전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그러나 여야 관계나 국정감사 얘기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고생이 많다” “상임위가 어디냐” 같은 의례적인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서면 브리핑에서 “원래 바비큐를 직접 구우려고 했었다” “계란말이가 잘 안 되더라” “뜨거운 것보다는 차가운 음료를 좋아한다” “올봄 메이저리그의 샌디에이고 선수들이 왔을 때” “국회에서 여야 축구는 어디서 하느냐” 등 윤 대통령의 ‘스몰토크’를 주로 소개했다.
만찬 시작 전 대통령실은 언론에 “당에서는 추석 민심과 정부에 대한 건의 사항을 전달”할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서면 브리핑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한 줄도 없었다. 친한계 참석자들은 “의료 위기, 김건희 여사 문제, 민생 문제 등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대통령실은 한 대표가 “대화 중간중간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 언급하거나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인요한 최고위원이 윤 대통령의 “원전 생태계 복원 성과”를, 추경호 원내대표가 윤 대통령의 “양자학 지식”을 추어올리는 발언을 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 대표의 경우 “대통령님이 감기 기운 있으신데 차가운 것 드셔도 괜찮으십니까”라는 발언 하나만 공개했다.
한 대표가 선출된 7·23 전당대회 이튿날 열렸던 만찬은 실내에서 진행됐다. 이번 만찬은 윤 대통령의 감기 기운에도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실외 분수정원에서 진행됐다. 깊은 대화보다는 20여명이 마주 보고 앉은 상태에서 윤 대통령 특유의 다변을 주로 경청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리 배치는 두 달 전 만찬과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 맞은 편에 한 대표가 앉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 대표는 윤 대통령에게 직접 독대를 요청하지 못했다. 만찬이 끝나고 윤 대통령이 자리를 뜬 뒤에야 홍철호 대통령 정무수석에게 ‘귓속말’로 대통령과의 독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만찬에 참석했던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25일 문화방송(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대통령이 먼저 떠나고 한 대표가 바로 앞 1m 거리에서 정무수석한테 귓속말로 무슨 이야기를 10여초 했다. 나중에 정무수석한테 귓속말할 때 이런 이야기(독대 재요청)가 있었냐고 하니까 ‘맞다’고 했다.”
김 최고위원은 “한 대표가 바로 대통령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발언을 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한 대표 스스로 이 자리에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거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여권에서는 검찰 시절을 포함해 20여년을 함께 했던 윤-한 관계가 ‘나중에 한 번 시간을 내달라’는 말도 직접 하지 못할 정도로 틀어졌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지난 8일 윤 대통령과 ‘번개 만찬’을 했던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25일 한국방송(KBS) 라디오 ‘전격시사’에 출연해 윤 대통령과의 전화통화나 문자메시지 교환은 여권 정치인들에게 “아주 자유롭고 편안하다”고 했다. 윤 의원은 “대통령한테 문자 하면 문자 딱 답신 주신다. ‘한번 뵙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래, 와라’ 이런 (식이다). 만나는 사람의 신뢰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윤 대통령에게) 독대 요청할 때 문자 딱 넣어서 ‘뵙고 싶다’고 얘기할 것 같다. 언론에 노출될 일도 절대 없다”고 했다.
윤 의원은 한 대표가 정무수석을 통해 독대를 재요청한 것에 대해 “저 같으면 그렇게 안 한다”고 했다. “대통령한테 직접 문자나 전화를 드려서 ‘잠깐 뵙고 싶다’ 그러면 ‘들어와라, 빨리 보자’. 이렇게 쉽게 당정 관계가 돼야 한다.”
두 달 전 만찬에서 “우리 한 대표”라고 했던 윤 대통령은, 이번 만찬에서도 “우리 한 대표”라고 불렀다. 검사동일체로 20여년 동고동락했던 두 사람은, 이제 직접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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