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안세영의 물집, 정현의 물집
추석 명절까지도 35도를 넘나들던 폭염이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이젠 가을 느낌이 완연합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고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도 찾아왔습니다. 계절은 변하고 있지만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뜨겁기만 합니다.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현안 질의에는 안세영의 발바닥 물집 사진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운동화를 억지로 신다 보니 결국 탈이 났다는 취지였습니다. 사진을 공개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역구는 광주 광산구 을입니다. 안세영의 고향 역시 광주이다 보니 애정이 많아 보였습니다. 묘하게도 광주배드민턴협회 회장은 현재 김택규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과 갈등을 빚으며 자격정지 징계를 받아 법정 공방까지 예고했습니다. 광주배드민턴협회 회장은 민형배 의원과도 막역한 사이라는 게 배드민턴 관계자들의 설명입니다. 배드민턴 행사장에서도 자주 마주쳤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더군요. 국내에서 대표적인 생활체육 종목인 배드민턴은 동호인이 많아 정치인에게는 중요한 표밭이 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네요. 다시 안세영 물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민형배 의원은 “(후원사) 브랜드 신발을 신을 때 나타났던 현상이다. 발이 저 난리가 났는데도 규정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른들의 한심한 처신이 이해가 안 된다”라며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안세영이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뒤 신발 선택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호소문까지 작성했다는 사실도 전해졌습니다.
<사진> 물집이 잡혀 상처투성이가 된 안세영의 발바닥. 민형배 의원실 제공
안세영을 비롯한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들은 공식 후원사의 신발, 라켓, 의류, 가방 등 용품 일체를 사용해야 합니다. 배드민턴협회 규정은 '국가대표 자격으로 훈련 및 대회 참가 시 협회가 지정한 경기복 및 경기 용품을 사용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약 조건에 따라 이 후원사는 연간 290만 달러(약 38억 원)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라켓, 신발 등 경기력에 직결되는 용품까지 후원사 물품으로 쓸 것을 예외 없이 강제하는 경우는 올림픽, 아시안게임 종목 가운데 배드민턴과 복싱뿐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골프 국가대표선수에게 공식 후원업체의 드라이버, 아이언, 퍼터를 똑같이 쓰게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만약 안세영 같은 간판선수의 다른 브랜드 사용이 허용된다면 후원 규모는 절반까지 줄어들 수도 있다고 하네요. 대한배드민턴협회는 거액의 후원을 받아야만 주니어 육성, 국제대회 파견 경비 등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이날 국회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은 국가대표 선수에게 후원사 용품만을 사용해야 하는 강제 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안세영의 격정 토로가 오랜 관행을 깨뜨리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안세영은 발이 편한 신발을 통해 물집 걱정 없이 플레이에 집중하면서 거액의 스폰서십 계약을 통해 돈방석에 앉게도 됐습니다. 대신 후원금이 줄어들 게 분명해진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새로운 재원 마련을 위해 마케팅 활동에 더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화이팅이 넘치는 안세영의 플레이 모습. 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안세영 사태를 통해 내년 1월 임기가 끝나는 김택규 회장의 연임도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연임을 위해 일찌감치 선거운동에 들어간 모양새였습니다. 파리올림픽 때는 측근으로 분류되는 지방 배드민턴협회 회장 몇 명을 협회 비용을 들여 동행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기도 합니다. 김 회장이 연임을 포기하면 연간 거액의 출연금을 낼 만한 대기업 오너가 회장으로 추대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날 국회에 출석한 김학균 대표팀 감독도 안세영 물집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김학균 감독은 “훈련이나 대회 과정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세영의 발바닥 부상이 경기 형태나 자세, 스텝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도 따로 전했습니다.
안세영은 허슬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는 끈질긴 수비도 강점입니다. 그 어떤 선수보다도 많이 뛰어다니며 코트 커버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발바닥에도 무리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신발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가지 브랜드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현실에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소속팀 삼성생명에서 뛸 때는 자신과 계약을 원하는 다른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나서기도 했으니까요.
<사진> 2018년 호주오픈 4강 신화를 이룬 뒤 공개된 정현의 물집 잡힌 발바닥. 정현 인스타그램
안세영의 발바닥을 보면서 어느덧 잊힌 존재가 된 정현이 떠올랐습니다. 2018년 시즌 첫 메이저 테니스대회인 호주오픈 때 일이죠. 정현은 노박 조코비치 등 강자들을 연파하며 4강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필자는 갑작스러운 멜버른 취재 지시를 받은 뒤 7시간 만에 호주행 비행기에 올라탄 웃지 못할 기억도 있습니다.
정현의 준결승 상대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직관 기회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정현은 발바닥 부상으로 기권했습니다. 심한 물집에 진통제 주사까지 맞아가며 투혼을 발휘했으나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당시 물집이 심하게 잡혀 벌겋게 생살을 드러낸 정현의 양쪽 발바닥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정현의 물집은 요즘은 사라진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검색어 순위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안세영 발바닥도 상위를 차지했을 겁니다.
<사진> 전성기 시절 정현의 백핸드 스트로크. 동아일보 지면 캡쳐
정현의 물집은 아킬레스건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테니스 전문가들은 정현 플레이 스타일이 물집을 쉽게 유발하게 된다고 분석하더군요. 정현의 허리 디스크와 부정교합도 물집이 자주 잡히게 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테니스 국가대표와 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한 노갑택 명지대 교수는 “메이저 대회 5세트 경기를 견디려면 체중 조절도 필수다. 정현은 순간적으로 쓰는 힘은 좋은데 근지구력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체력 상태에 따른 기복이 보인다. 열흘 넘게 한 토너먼트에서 버틸 수 있는 뒷심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노 교수는 또 “정현은 공 하나하나를 치는 데 모든 체중이 발바닥에 실리는 느낌을 준다. 스플릿 스텝, 사이드 스텝 등 뛰면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스텝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적절한 체중 관리로 발바닥에 가해지는 부하를 줄여야 하고 스텝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죠.
NH농협은행 테니스부 감독 출신인 박용국 양재 플렉스 테니스클럽 대표는 “테니스는 좌우 사이드 스텝 비중이 70~80%를 차지한다. 무빙 동작에서 체중의 2배 이상 압력이 발바닥에 전달된다”라며 “정현은 양발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코비치를 보면 준비 동작에서 테니스화가 코트 표면과 마찰하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들을 수 있다. 상대가 공을 임팩트하는 순간 제자리에서 여러 차례 살짝살짝 점핑해 자세를 잡는 스플릿 스텝 등 다양한 스텝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최적의 스트로크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라고 설명하더군요.
한국 테니스의 레전드인 이형택도 현역 시절 물집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네요. 이형택은 “물집이 양쪽 발바닥에 너무 자주 생겼다. 굳은살을 배게 하려고 일부러 맨발로 코트를 걷기도 했다”라며 웃더군요. 그러면서 이형택 역시 “스텝 연습으로 어느 정도 (물집을) 극복할 수 있다. ATP에서는 경기 전 쿠션이 있는 패드를 발에 붙이도록 하거나 테이핑을 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뜨거운 코트 바닥에서 경기 도중 급하게 회전하다 보면 굳은살 안쪽으로도 물집이 생기기도 한다”라고 하더군요.
물집은 경기력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물집을 의식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집 탓에 평소와 다르게 발바닥을 내딛다 보면 밸런스가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안세영도 물집 걱정이 심했나 봅니다. 물집 신경을 쓰다가 자칫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사진> 최근 일본의 ITF 대회를 통해 투어에 복귀한 정현. SBC드림테니스 SNS
정현은 22세 어린 나이에 호주오픈 4강이라는 정점을 찍은 뒤 아쉽게 하강 곡선을 그렸습니다. 그 원인은 다양하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번아웃, 거듭된 부상, 큰 목표를 이룬 뒤 찾아온 허탈감, 완벽주의에 가까운 스타일….
2018년 4월, 19위까지 찍었던 세계랭킹이 1500위 밖으로 밀려나 집계조차 되고 있지 않습니다. 장기간 코트를 떠나 있기 때문이죠. 최근 테니스코리아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미니투어 대회에 나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테니스를 이끌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걸 생각해 보면 안타까움이 커집니다.
공교롭게도 안세영 역시 22세에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습니다. 올림픽 후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자랑스럽게 그 기쁨을 누렸어야(다른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했지만, 소신 발언 파문 이후 외부와 접촉마저 꺼리고 있습니다. 대표팀 코치로 안세영과 각별한 관계였던 한 지도자는 “세영이가 휴대전화 착신을 끊었더라. 저번에 정읍에서 하는 연맹전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게 돼 안쓰러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세영이 쏘아 올린 셔틀콕에 국내 배드민턴 코트의 낡은 폐습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안세영을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만큼은 없어야겠습니다. 안세영 자신도 새로운 환경에서 재도약해야겠지요. 다시 날기 위해선 용품뿐 아니라 심기일전도 중요할 겁니다. 어쩌면 다음 달 경남 밀양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이 안세영의 복귀 무대가 될 공산이 큽니다. 화이팅 넘치는 플레이와 화끈한 세리머니를 기대해 봅니다.
<사진> 안세영의 화려한 세리머니. BWF 인스타그램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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