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다해 베풀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 닮고싶어요[추모합니다]

2024. 9. 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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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합니다 - 나의 아빠 故 백현옥 조각가(인하대 명예교수·1939~2024) <하>
2023년 7월 아버지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경기 남양주시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아버지의 초대전에서. 이날 찍은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조각하는 아빠는 늘 멋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자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자연스럽게 조소과를 선택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빠의 공간감이나 머리와 손이 하나로 움직이는 조형 능력을 물려받지 못했다. 미련이 남아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도 조각가의 꿈을 내려놓지 못하다가, 결국은 능력 부족을 깨닫고 그나마 조금 물려받은 색에 대한 감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살려 서양화과로 전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양화 전공이면서도 조각가인 아빠의 스케치 실력에도 못 미쳐 결국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건축조명설계전공으로 유학길에 오르며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순수미술을 떠난 이유는, 물론 부족한 능력도 문제였지만, 아빠의 타고난 자유로운 예술가적인 영혼은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기도 했다.

아빠는 늘 새로운 것과 미적인 것에 호기심이 넘쳐 오지를 여행 다니셨고, 누구를 만나던 마음을 터놓았으며, 그 순수함 탓에 친구들이 어려울 때 선뜻 보증인이 되어 큰 경제적 손해를 여러 번 보시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잃지 않으셨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셔서 우리 집이나 아빠의 작업실에는 늘 아빠의 먼 친척이나 제자, 후배가 머물러 살았었고 엄마는 그들을 잘 대접하는 것이 부여된 임무인 것처럼 사셨다. 이렇게 베풀기만 하는 아빠가 성인이 되고는 종종 답답하기도 했는데, 아빠의 장례를 치르며 수많은 제자와 지인들이 진심으로 아빠의 인품과 작업을 칭송하고, 눈물로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목격하며 아빠가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목격은 나의 삶의 태도도 바꾸고 있는 듯하다.

아빠의 천재적인 예술성은 다 물려받지 못했지만, 늘 예술가와 작품에 둘러싸여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미술관과 박물관 조명설계가 현재 내가 하는 일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진로를 바꾼 후부터는 순수예술 트레이닝의 덕을 톡톡히 받아 늘 창의적인 시각을 칭찬받기도 했다. 뉴욕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나름 유수의 조명설계사무소에 취업해 수년간 세계 다양한 공간의 조명설계를 정신없이 하면서, 예술작품을 조명하는 것이 특별히 더 즐거웠고, 내가 순수예술과는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작품과 작가들 곁에서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작업이 가장 행복한 것은 아마 아빠가 물려주신 나의 유전자에 그렇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또한, 한 작품이 어떤 공간에 놓이기까지 걸린 그 수고와 재능과 열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고와 감동이 관람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를 고대하며, 클린턴 프레지던셜 라이브러리,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재능문화센터, 서울공예박물관, 베트남 군사역사박물관 등 수많은 전시공간을 설계해 왔다. 예술은 의식주와 가장 먼 행위이지만, 그렇기에 그 가치가 가장 극대화되며, 관람자의 삶을 확장하여 풍요롭게 한다. 나는 그러한 길을 이끌어주는 예술가들을 누구보다 존경한다.

아빠가 근 60년간 참여하며 가장 사랑하고 아낀 낙우회의 초대전이 우연치 않게도 내가 설계한 서울아트센터 내 도암갤러리에서 아빠의 소천 얼마 후인 9월 19일 시작되어 10월 10일까지 열린다. 아빠와 최근 작고하신 정현도 선생님, 조재구 선생님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되었고, 감사하게도 조명 연출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살아생전 효도 한번 못했는데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아빠를 기쁘게 해드려 다행이다. 앞으로도 나의 일 안에서 아빠처럼 예술과 삶과 인간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이제야 아버지라고 예를 갖춰 불러보려 한다.

아버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살아오신 길을 존경합니다. 잊지 않고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닮게 살다가 훗날 하늘에서 밝은 얼굴로 아버지를 뵙겠습니다.

막내딸 백승주(캔델라 건축조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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