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국제고 고시엔 우승, 찬사와 혐오에 가려진 뒷이야기
8월23일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중학고등학교(이하 교토국제고)가 고시엔(일본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한신고시엔 구장에 한국어 교가가 울려퍼졌다. 오랜 연습으로 검붉게 그을린 얼굴에 먼지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선수들은 함께 교가를 불렀다. 한국인, 일본인 관계없이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은 모두 감동했다. 일본 고교야구부 3700여 팀이 겨루는 고시엔 왕좌의 자리는 보통의 땀으로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찬사와 축하의 말들이 SNS와 각종 미디어에서 넘쳐났다.
‘한국어 교가’로 촉발된 한국 미디어와 SNS 쪽의 과장된 반응들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한국어라는 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위대함으로 곧바로 연결되어버리는 현상도 그렇거니와,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위대함 같은 과장으로 포장되거나 심지어는 찬사 끝에 ‘조선학교 만세’ 같은 말까지 붙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했다. 한국어 교가가 고시엔에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이 우익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즉각적인 행동을 촉발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승 직후부터 교토국제고는 혐오주의자들의 맹공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에서의 ‘국뽕’과 일본에서의 혐오 공격, 두 현상은 공통적으로 ‘한국어 교가’에서 촉발되었다. 생중계하던 NHK가 ‘학교에서 제공한 자막’임을 표시하고 ‘동해’를 ‘동쪽의 바다’로 ‘한국의 학원’을 ‘한일의 배움터’로 일역하면서 논란이 커지기도 했다. 필자는 교가의 일역본을 학교에서 제공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특히 재일조선인에게 가해지는 무수한 공격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교토국제고는 2021년 첫 고시엔 진출 때에도 같은 논란을 겪었다. 당시 학교 측에서는 일역본 교가 가사를 제시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른 후 학교 관계자의 인터뷰를 보면 “조만간 교가를 바꿀 생각이다”라고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바꾸지 않았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빚은 소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가가 아니라 학교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교토국제고를 이해하려면 재일 민족교육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 사람 아니니 알아서 하라’
흔히 재일 조선학교(현재 64개교), 재일 한국계 학교(4개교), 재일 민족학급을 통틀어 재일 민족교육기관이라 부른다. 모두 1945년 해방 직후 일본 전역에 만들어진 500~600여 곳 국어강습소를 출발점으로 한다. 국어강습소는 점점 조선인학교로 체계를 잡아나갔다. 당시 민족교육의 체계화와 귀국사업이 주요 활동이었던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은 설립 초기에는 전 민족적 재일조선인 조직이었으나 몇 번의 대회를 거치면서 친일파, 무정부주의자, 우익계 민족주의자들이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이들은 1946년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후 1994년 재일한국민단으로 개칭)을 설립했다. 일본공산당의 지휘를 받던 조련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된 1948년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련과 그 산하의 조선학교는 1949년 10월 강제 해산·강제 폐교되었다.
재일 한국계 학교로 분류할 수 있는 오사카의 건국한국학교(1946년 개교), 오사카금강인터내셔널소중고등학교(1946년 개교), 동경한국학교(1954년 개교) 그리고 교토국제중고등학교(1947년 개교)는 아마도 이 시기에 조련 산하에서 탈피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연합국총사령부(GHQ)가 물러나고 일본 정부의 독자적 운영이 시작되는 19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다. 강제 폐교를 당한 조선학교의 학생들은 일본 공립학교, 공립학교의 분교, 민족학급, 자주학교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강화조약 발효 전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해 ‘일본 국적이니 독자적인 교육을 할 수 없다’며 폐쇄시키거나 공립조선인학교로 만들어 동화교육을 시키더니, 조약이 발효되자마자 재일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이어서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일본 사람이 아니니 알아서 하라’며 재일조선인 아동 4만명을 방치했다.
1955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가 설립되었고 재차 조선학교 건설 운동이 촉발되었다. 195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약 2억 엔을 송금했다. 연이어 1959년부터 귀국운동(북송사업)이 시작되었고 조선학교 건설 운동은 다시금 활기를 맞이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조선학교든 한국계 학교든 관심이 없었다. 조선학교는 북한으로부터 연 1회 이상 지원을 받았지만 한국계 학교는 살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할 형편이었다. 한국계 학교들은 이후 1960~1970년대를 거쳐 한국 정부로부터 재일 한국학교로 인가를 얻고 약간의 지원금을 받았지만, 학교 운영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2024년 현재 재일 한국계 학교 4개 중 동경한국학교를 제외한 3개 학교는 현재 모두가 ‘1조교’다. 학교교육법 제1조에 해당하는 일본의 정규 공·사립학교다. 반면 조선학교들은 모두 ‘각종학교’에 속한다. 각종학교는 지자체장의 인가를 요하는 한편, 1조교는 문부과학성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1조교는 또한 문부과학성의 학습지도요령을 준수해야 한다. 모든 수업에서 검정통과 교과서를 사용하고, 일본어로 수업해야 하고, 국어와 역사는 일본어와 일본 역사이다. 한국어 수업의 경우 원어민 교사가 강의하는 차이점이 있는 정도다. 1조교가 되면 사학 조성금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일본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받는다. 2010년부터 시행된 일본의 고교무상화 제도의 혜택도 받고 있다.
교토국제고는 원래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은 각종학교인 외국인학교로서 ‘교토한국학원’이었다. 그런데 2003년에 1조교 신청을 하고 학교명을 바꾸어 ‘교토국제고’가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인 학생의 입학을 받아들였다. 필자는 이것을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 해석한다. 고시엔 우승 후 학교 측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일찍이 한국 정부로부터 운영비 일부, 한국어 교사 등의 지원을 받고는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학교를 운영·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1999년 야구부를 창설해 고등학교야구연맹에 가입하고 야구 특성화 고등학교를 목표로 삼고 전격 지원한 일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재일동포 선수들로 시작된 야구부도 1조교 인가를 통해 일본인 학생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타개책을 마련해갔다. 교토국제고는 2024년 현재 전체 학생 수 137명, 이 중 일본인이 116명이다. 전교생 가운데 남학생이 68명이고, 그중 61명이 야구부원이라고 한다.
‘한국어 교가’ 찬양이 씁쓸한 이유
반면 조선학교는 여전히 각종학교를 고집한다. 고교무상화에서 제외되었고 지자체 교육보조금도 끊어지고 고등학교 졸업 자격도, 기부금 면세 혜택도 없다. 2002년 시작된 납치 문제로 정부는 노골적으로 조선학교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으며 혐오주의자들의 공격은 2009년 교토조선학교 습격 사건에서 보듯이 도를 넘었다. 이 때문에 학생 수가 급감했고 저출산도 또 하나의 요인이 되어, 일본 대도시를 중심으로 조선학교의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육지책이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오사카에서만 5개 조선학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학교들이 생존의 방법으로 1조교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조선학교가 생각하는 민족교육이란 전 과목을 우리말로 수업하고, 우리 역사를 일본 정부의 간섭 없이 제대로 배우고 자율성을 침해받지 않는 것이다. 1조교를 선택하는 것은 곧바로 민족교육을 포기하는 것이고 이는 조선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교토국제고의 선택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조선학교를 향해 ‘미련하다’고 할지 모른다. 반대로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교토국제고와 같은 학교들에 대해 ‘민족 정체성을 버렸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평가 모두 외부인의 평가다. 당사자들에게는 필연의 이유가 있다. 일본인 학생을 대폭 받아들이고 일본말로 수업하고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심어주지 못해도 한국어 교가를 지키고 양쪽 정부의 지원을 받고 야구 명문고가 되는 길을 선택한 교토국제고.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정부의 각종 차별과 줄어드는 학생 수, 재정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북·일 수교와 통일을 기다리며 조선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려는 조선학교.
이들 학교 모두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도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의 공격은 한국계 학교와 조선학교를 가리지 않는다. 고시엔 우승 직후 교토부 지사가 교토국제고에 가해진 혐오 공격에 대해 법적조치를 요구하고 나설 정도다. 일본 내 차별주의자들에게 조선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말과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는 동일한 혐오 대상이다. 한편 ‘한국어 교가’ 찬양에 몰두하는 한국의 미디어와 SNS에서의 반응이 교토국제고의 일본인 학생들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야구를 하러 이 학교에 들어왔지 한국을 사랑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학교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교가가 우리말(조선어, 한국어)이고, 일본에서 인정하는 경기에 출전하여 성적을 낼 때에야 한국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면 조선학교 아이들, 선생님들, 보호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눈에 띄는 성적을 보여주면 관심을 가지지만 정작 차별에 신음하고 고통에 시달릴 때는 무관심했던 한국 사람들. 두 종류 학교의 동포 아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을 진심을 다해 축하한다. 한국어 교가가 없더라도 일본인 선수가 대부분이라도 마음을 다해 축하할 일이다. 교토에서 고시엔 우승 학교를 배출한 것이 68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재일동포 스포츠 세 가지 뒷이야기
1. 교토국제학교는 1999년에 외국인학교 경식(硬式) 야구부로서는 처음으로 고교야구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이미 1991년에 고교야구연맹에는 가나가와조선고급학교 등 7개 조선학교 연식(軟式) 야구부가 가입되어 있었다(현재는 조선학교에 야구부가 없다).
어찌 된 일일까? 원칙적으로 일본고등학교체육연맹(고체련)이 주최하는 공식 대회에 조선학교 등 외국인은 참여할 수 없었다. ‘각종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1991년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배구부가 고체련의 행정 실수로 예선전에 참여하게 되었고, 1차 예선을 통과해버렸다. 고체련은 행정 실수를 발견하고 해당 학교에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저항하여 외국인학교 고체련 가맹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졌다. 일본 학생들도 서명운동에 동참할 정도로 크게 진행된 이 운동으로 결국 1994년 고체련은 조선학교 등 외국인학교의 가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 고시엔 대회에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 것은 처음이지만 고시엔 대회에 참가한 재일조선인 소년들은 이미 숱하게 많다. 거의 모두 일본어 이름으로 참가했으니 일일이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드물게 ‘본명’으로 참가한 재일조선인 야구 소년들도 있었다. 1981년 8월 고시엔 결승전 호토쿠가쿠엔 대 교토쇼교의 경기에는 양쪽 합해 총 7명의 재일동포 야구 선수가 참가했다. 이 중 교토쇼교의 한유와 정소상이 본명으로 참가했다. 이때도 일본뿐 아니라 한국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더구나 호토쿠가쿠엔의 에이스 투수 가네무라 요시아키(김의명) 역시 재일동포였다.
야구 외에 고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와 럭비선수권대회에서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선전이 눈부셨다. 축구에서는 2005년도 오사카조선고급학교 축구부가 8강에, 럭비에서는 같은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가 1994년 공식전에 첫 출전한 이후 2003년 전국 대회에 처음 진출했고, 2009·2010·2020년 총 3회 전국대회 4강 진출에 성공했다.
3. 일본 야구계에 재일동포들이 남긴 흔적은 선명하다 못해 화려하다. 1944년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신)의 감독 겸 에이스 투수였으며 3번 타자 이팔용(일본명 후지모토 히데오)은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은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인 400승 달성, 4490개 탈삼진을 이뤘다. 장훈(하리모토 이사오)의 통산 3085 안타는 이치로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그 밖에도 〈한국일보〉 주최로 1956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 600여 명의 활약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경기를 통해 김성근·배수찬 등 한국 야구 발전의 거름이 된 재일동포 지도자와 선수들이 숱하게 배출되었으며 이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김명준(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우리학교> 감독)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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