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하지 말자? 기성세대엔 통일할 역량도, 포기할 권리도 없다
임종석 문재인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의 "통일, 하지 말자"며 "평화적이고 민족적인 두 국가를 수용하자"는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권과 보수언론에선 조선(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라며 색깔론을 펴고 있지만, 이는 정략적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김정은은 민족과 통일 개념을 폐기하고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를 들고 나온 반면에, 임종석은 '평화적이고 민족적인 두 국가론'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8월 11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비슷한 주장을 편 바 있다. '우리 안의 북한'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조선'을 상대하자며 통일은 미래 세대의 선택에 맡겨두고 남북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적대성의 완화와 해결을 도모하는 데에 '두 국가론'의 유용성을 살펴보자는 글이었다.
통일을 아예 하지 말자는 주장을 제외한다면, 통일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가급적 빨리 통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정책의 주안점을 통일 실현에 맞추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흡수통일'을 겨냥한 것으로 김영삼·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부의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통일은 천천히 하면서 화해협력과 평화정착을 이뤄내 통일 기반을 닦는 데 힘을 쏟자는 것이다. 이는 '평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노태우·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접근법이다. 오랜 기간 많은 국민이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셋째는 통일은 미래 세대의 선택에 맡기고 우선 남북관계를 '평화적인 두 국가'로 재설정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자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역대 정부가 선택한 적은 없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첫째는 몽상에 가깝다.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바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남북 간에 적대성만 심화시켜 통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둘째와 셋째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공통점은 당면 과제로 화해협력과 평화를 중시하면서 통일을 훗날의 희망으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반면 차이점은 그 과정에 있다. 둘째는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중시한다. 셋째는 특수관계론보다는 상호간 국가성의 존중에 기반을 둔 '평화적 두 국가론'을 중시한다.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엄연한 현실부터 직시할 필요는 있다. 그것은 바로 '1991년 체제'의 파탄이다. 1991년 체제란 남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면서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국제법적으론 두 국가이면서도 민족 내부적으론 통일지향적인 특수관계를 지향함으로써 둘 사이의 선순환을 도모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방점은 특수관계론에 있었다.
하지만 남북은 통일지향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도, 서로가 국가성을 인정하면서 평화 공존을 도모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오늘날 남북관계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적대적인 이웃을 향해 퇴행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고민과 토론의 지점은 특수관계론에 입각한 1991년 체제(구체제)를 복원하는 데에 주안점을 둘 것인지, 지금까지 시도하지 못(안)한 평화적 두 국가론에 방점을 찍는 신체제를 모색할 것인지에 두어야 한다.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다. 한쪽의 선택이 다른 한쪽의 미래를 열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특수관계론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경로, 즉 평화적 두 국가론을 우선 추구하면서 특수관계론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더 현실적이고 이롭다. 특수관계론에 입각한 '북한'이라는 호칭보다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라고 부를 때, 적대성의 완화와 대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휴전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양측의 오물과 확성기 방송도 국제 규범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특수관계론의 가장 폭력적인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유사시 무력통일론'과 '조선의 전시 무력편입론' 모두 유엔 헌장에 위배되는 만큼, 이를 내려놓는 것도 공론해볼 수 있다.
엄연한 현실인데 망각하고 있는 게 있다. 한국과 조선이 유엔 회원국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평화 공존의 기본도 유엔 헌장에서 찾을 수 있다. 주권과 영토 보존 존중, 내정 불간섭 원칙, 분쟁의 평화적 해결, 평화 유지 노력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평화 공존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국가성의 인정이다.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라는 자각은 특수관계론의 법적 토대인 국가보안법 폐지와 헌법 개정 논의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구체제를 복원하는 것보단 신체제를 도모하는 게 낫다. 그렇다고 구체제의 숙원, 즉 평화통일을 영구적으로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는 후세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하다. 기성세대에겐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도 없고, 그렇다고 통일을 포기할 권리도 없다.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남북관계의 적대성을 최대한 해소하고 평화 공존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 세대가 지금보다 나은 조건과 환경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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