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이상훈]사라져 가는 日 서민쉼터 센토, 카페로 변신… 목욕탕 문화 지키기
수십년 된 목욕탕, 커피숍으로 재탄생… 욕조-타일 유지하며 이색 분위기
아파트 확산-목욕 문화 변화에… 대중탕 수 27년 새 3분의 1로 감소
목욕탕 업계, 홍보 힘쓰며 활로 모색… 외국인 관광객 유치, 사우나 붐 활용도
● 폐업한 목욕탕, 명물 카페로 재탄생
가게 점장인 오사토 에미(大里惠未) 씨는 “70년 넘은 목욕탕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옛 일본 목욕탕 분위기를 살렸다”며 “처음에는 지역 주민이 찾는 가게로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한국, 유럽 등 외국인 손님도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오전 시간대 카페에는 일본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았다.
애초 이곳은 1951년 ‘미야노유’ 대중목욕탕으로 개업한 곳이다. 여느 목욕탕처럼 수십 년이 지나 노후화되고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2007년 문을 닫았다. 대다수 목욕탕은 폐업 후 철거하거나 내부를 완전히 개조하지만, 이곳 건물주 생각은 달랐다. 건물주이자 목욕탕 건설업체였던 스즈와건설은 목욕탕 외관과 내부를 최대한 살리면서 상업시설로 개조해 카페 등을 입점시킨 것. 회사 측은 “목욕탕으로 재개업하는 건 어렵지만, 일본의 중요한 문화인 목욕탕 문화를 지키면서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가꾸고 싶었다”고 리모델링 취지를 설명했다.
● 아파트 보급-연료비 상승에 폐업 증가
일본인의 목욕 사랑은 유별나다. 12세기에 돈을 받고 운영하던 목욕탕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길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고도 경제 성장이 본격화돼 도쿄 등 대도시에 인구가 몰리고 보일러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주택가 곳곳에 대중목욕탕이 성업을 이뤘다. 높은 천장에 후지산 그림이 그려진 벽을 배경으로 뿌연 수증기가 가득한 목욕탕 풍경은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대중목욕탕은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다. 1996년 1503곳이던 도쿄 목욕탕 수는 지난해 444곳으로 3분의 1 이하로 감소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아파트 및 최신식 주택 보급이 확산하면서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담그는 대신 집에서 샤워하는 문화가 확산됐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옷을 벗고 같은 탕에 몸을 담그는 게 갈수록 꺼려지는 건 한국과 일본이 크게 다르지 않다.
목욕 요금을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해 인상 폭이 미미하다는 것도 대중목욕탕 사업이 위축된 이유다. 업계에서는 연료비에 비해 요금 인상 폭이 너무 작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로 인한 경영난 역시 큰 어려움으로 꼽혔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대중목욕탕 요금을 지자체가 통제한다. 시민 누구나 부담 없이 목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도쿄도 목욕탕 조합’에 등록된 목욕탕 요금은 성인 기준 550엔(약 5100원). 조합에 가입된 목욕탕 어디든 동일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도 목욕탕 업계에 치명타가 됐다.
하코네, 유후인 등 유명한 온천 휴양지는 한국 등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찾지만, 동네 대중목욕탕은 대부분 관광객과 거리가 멀다. 애초 관광 시설이 아닌 데다 대부분 여행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 활로 찾으며 생존 모색하는 日 목욕탕
대중목욕탕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면서 다른 업종 가게로 변신한 곳은 일본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 도쿄 우에노와 가까운 주택가 마을 시타야에 자리한 카페 ‘레본 가이사이유’는 1928년 세워진 목욕탕 ‘가이사이유’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2016년 노후화로 문을 닫은 뒤 목욕탕 내부를 그대로 살리면서 전용 로스터 기계를 갖춘 커피숍으로 거듭났다.
교토 기타구의 카페 ‘사라사 니시진’은 90년 넘게 영업한 대중목욕탕을 개조해 지역의 명물로 거듭났다. 오래된 목욕탕 외관을 그대로 살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온천과 비슷한 외관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전히 목욕탕으로 영업 중인 곳들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홍보에 나서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몸을 씻는 공간이었던 대중목욕탕이 최근에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거 대도시 주택가는 관광지와 별개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엔화 약세 현상으로 많이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이 도심과 떨어진 골목까지 들어오면서 새로운 수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중탕 문화가 낯선 서양인들을 위해 신발은 어떻게 벗고 탈의실은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영어 안내문을 비치해 놓은 목욕탕이 늘고 있다.
추석 연휴에 3박 4일 도쿄 여행에 나선 한국인 회사원 김경호 씨(43)는 여행 기간 중 매일 저녁 주택가 대중목욕탕에서 피로를 풀었다. 호텔에 욕조가 있었지만, 도쿄 주택가 곳곳에 대중목욕탕이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찾았다. 김 씨는 “온천 관광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공간인 데다 한국보다 요금이 훨씬 저렴해 부담 없이 찾았다”며 “마치 현지 주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년 전부터 일본에서 늘고 있는 사우나 목욕은 대중목욕탕 업계에서 ‘호재’로 여겨진다. 그간 일본의 대중목욕탕에는 사우나 시설이 없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사우나를 다룬 만화 ‘망가 사도(サ道)’가 2019년 TV 드라마로 제작된 뒤 매년 연말마다 스페셜 드라마로 방영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사우나 붐이 불었다. ‘사우나 활동’의 준말인 사카쓰(サ活), 사우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뜻하는 사타비(サ旅) 같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에 발맞추어 대중목욕탕들은 사우나 설치에 더욱 적극 나서고 있다. 또 실제 고객 유치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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