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그들이 검새와 기레기로 불리는 까닭
진린의 존경 한몸에 받은 순신
명나라 수군 처벌 권한 받아내
명 황제로부터 벼슬 받은 순신
선조와 동등한 지위 지닌 셈
순신을 ‘어르신’이라 부른 진린
노야老爺. 명나라 제독 진린이 이순신을 부를 때 쓴 호칭이다. 우리 말로 통제사 영감 또는 통제사 어르신쯤 되겠다. 진린이 얼마나 이순신을 존경했는지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이처럼 호칭엔 갖가지 의미가 담기게 마련이다. 검새, 기레기가 돼버린 검사와 기자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대목이다.
절이도해전 직전까지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의 관계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이순신이 조선 수군 장졸들을 이끌고 명나라 수군 주둔지 주변의 가옥들을 모두 부숴버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고금도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수군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왔는데도 일부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한 데 따른 이순신의 조치였다.
그러자 진린 제독은 이순신에게 통역관과 아장을 보내 사태를 파악했다. 이순신은 얼굴에 노기를 띤 채 이렇게 답했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진 도독을 우러러 보았더니, 명나라 군사들이 폭행과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소. 그래서 우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자 하오. 그러니 이제 이곳에는 백성들이 살 집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됐소. 나 또한 홀로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진을 옮겨 보화도로 가고자 하오!"
진린은 이같은 이순신의 말을 전달받고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다. 몰상식한 갑질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게 이순신의 의중이었다. 진린은 곧바로 이순신을 찾아가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명나라 수군의 진중을 조사시킨 후 해당 군사들을 잡아들여 이순신에게 보냈다. 또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범죄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절이도해전에서 대승한 지 며칠이 지난 뒤엔 안위와 송여종의 무리가 이순신을 찾아와 적의 수급을 명군에 선물로 준 일을 읍소하는 일도 있었다. "소인들이 사력을 다하여 전승한 공이 명나라 수군에 넘어갔으니,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오리까." 이순신은 "부패될 수급인데 저들에게 주는 게 무엇이 애석하리오"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임금에게 보고할 장계의 초본을 그들에게 보여줬다.
조선 수군의 공적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장계와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수군의 공적을 담은 또 다른 장계를 본 안위와 송여종 일행은 명나라 수군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자 하는 이순신의 뜻을 이해하며 돌아갔다.
진린 역시 고금도에 머물면서 이순신이 지닌 혜안의 내공과 인물 됨됨이를 자각했다. 그래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절이도해전 승전 보고서에 이순신의 자질과 훈공을 알리는 문서도 첨부했다.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라며 칭찬하는 글이었다. 같은 내용을 선조에게도 전달했다.
진린의 문서를 본 명나라 황제는 이순신에게 수군도독이라는 명나라 벼슬을 봉하고 도독을 인증하는 인수印綬를 비롯해 호두영패虎頭令牌, 귀도, 참도, 독전기, 남령기, 홍령기, 곡나팔 등 하사품을 내려 보냈다.
반면 선조는 이순신의 명군을 다루는 혜안과 진린의 글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의 창을 굳게 닫아놓고 있었다. 그릇이 그 정도였다. 닫힌 마음의 창 안에는 시기, 질투, 폄훼, 그리고 경계와 두려움만 차곡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복지輿服誌'라는 당나라 판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그 기록에는 '수군도독은 문무대신 및 속국의 번왕과 동등한 지위다'는 항목이 명시돼 있다. 굳이 따지자면 이순신은 조선 국왕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셈이다. 이순신은 또 명나라 황제로부터 면사첩까지 받은 바 있다. 면사첩을 지니고 있으면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까지도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런 완장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조선의 진정한 영웅이자 지도자인 까닭이다.
어찌 됐든, 진린은 절이도해전 이후 이순신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일방적으로 군령권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가마를 타고 행차할 때에는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가지 못하도록 했다.
또 이순신을 상대할 때에는 늘 '노야老爺'라고 호칭했다. 이는 '통제사 영감' 또는 '통제사 어르신' 등의 의미가 함축된 중국식 호칭이다. 당시에는 이순신 정도의 지위에 오른 인물을 대할 때는 사또, 대감, 영감 등으로 호칭했다.
대감과 영감이란 호칭은 현시대의 우리 사회에서도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 형태로 검사와 기자 무리들이 주로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관인대도寬仁大度와 정론직필正論直筆이 퇴색하면서 어느덧 '검새'와 '기레기'로 전락했다. 우리 사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 성찰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진린은 이순신의 맹산서해盟山誓海라는 시를 차운할 정도로 문무겸재의 장수였다. 어느날 진린은 이순신과 군무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내용의 시를 읊었다. "노야가 중국에서 벼슬을 하면 마땅히 천하의 으뜸이 될 것이거늘 어찌 소국에서 몸을 구부려 스스로 곤궁하리오." 이순신도 시를 지어 답할 정도로 두 인물의 신뢰는 깊어졌다.
이 무렵 조선 안팎에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조정에서는 영의정 류성룡을 파면했다. 선조가 이이첨李爾瞻, 유영경, 이산해 등이 이끄는 무리의 참소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선조는 이원익을 영의정, 이덕형을 좌의정, 이항복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일본도 상황이 달라졌다. 풍신수길은 친누나의 아들이자 양자인 풍신수차에게 관백 자리를 맡겨 내정을 살피도록 해왔다. 그러던 풍신수길은 1598년 어느 화창한 봄날에 온종일 벚꽃잔치를 벌였다가 바로 그날 밤 병이 나서 드러누웠다. 병세가 깊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조카인 풍신수차를 토사구팽하고 늦둥이 아들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줬다. 이후 풍신수차는 기주紀州의 산속에서 자살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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