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걱정 없는 생, 민생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성폭력법 개정을 위해 국회 관계자와 면담했다. 관계자는 성폭력의 여러 지표와 현황을 확인하며 적극 공감하다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민생 현안에 밀려요.” 다른 국회 관계자는 말했다. “딥페이크처럼 큰 뉴스여야 그나마 논의된다. 사망 사건이 있거나….”
두가지 면에서 놀랐다. 하나는 생명이 없어져야 국회나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힘을 받는다는 것. 그렇게 공공연히 말하는 것. 현저히 저항이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이 있어야 인정하는 현행 형법상 강간죄가 떠오른다. 더 큰 위험에 처해야 도움받을 수 있다는 기준은 안전을 도모하기보다는 더 위험한 상황으로 내몬다. 이 기준이 보호하는 것은 다양하고 종합적인 권리가 아니라 생존 여부가 된다. 딥페이크 성폭력은 ‘지인 능욕’이 빈번해진 지 수년차에 대규모로 드러난 것인데, 이 정도 규모의 여성들이 ‘능욕’되어야 법 개정이 이뤄지는 절호의 시기가 된다니…. 국회는 무엇에 막혀 있는 걸까.
두번째 놀란 것은 성폭력은 민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폭력은 민생 현장에서 일어난다. 업장, 거래처, 학교, 연구실, 알바하는 곳, 집, 공공일자리, 귀갓길, 면접처, 차 안, 학습과 훈련소, 온라인 정보망…. 원치 않는 성폭력을 온갖 일상에서 겪고 민생이 멈춰버린다. 그런 상황에 처하는 인구집단이 현대사회에서도 현대의 방식으로 계속 재생산된다. 성폭력 문제는 민생이, ‘먹사니즘’이 아닌가?
몇달 전 야당에서 먹사니즘이 캐치프레이즈처럼 등장했다. 여당은 야당에 먹사니즘을 말할 거라면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당장 멈추라고 공세를 취했다. 먹사니즘은 절박한 생존이나 인간다운 삶의 최전선인 줄 알았는데 종합부동산세, 금투세, 증여세, 상속세 감세 논의가 오간다. 언론은 기존 약자 복지 같은 전통적 의제를 후순위로 두는 방향 전환이라고 해설한다. 성장 동력으로서의 신산업 정책에 주력하리라는 것도 비교 항처럼 등장한다. 복지·불평등 완화를 경제·민생·산업과 대비하는 프레임 앞에서 의아해진다. 차별 해소를 ‘역차별’이라고 뒤바꿔버리는, 약자를 가해자 위치로 바꾸는 우파 프레임에 국회와 정치가 발목 잡혀 있는 것 아닌가.
딥페이크 성폭력은 엄마, 가족, 교사, 친구, 동료를 이미지로 포착해 성적 모욕 영상물로 변환·제작한 사건이다. 언론과 수사기관은 검거 피의자 60~70%가 10대 청소년이라며 비뚤어진 일탈로 보거나 촉법소년 연령 변경이 과제인 것처럼 다루기도 한다. 10대 문제라고만 보면 학교가 10대 여성 사진을 에스엔에스(SNS)에서 내리라고 가정통신문을 보내는 솔루션 정도로 귀결된다.
피의자 특정과 처벌, 신상공개를 하라는 주문도 있다. 하지만 경찰이 신분 위장 수사 등을 통해 어렵게 피의자를 특정해도, 여러 사정으로 구속도 기소도 처벌도 어려운 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 인터넷 사업자 책무를 범죄영상물 삭제·차단에 한정한다면 텔레그램 쪽이 겨우 제공한 메일 주소를 통해 몇십건 삭제하면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수동적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
딥페이크 성폭력이야말로 경제와 산업 문제다. 무수한 지인 능욕 방을 통해 지인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해악적 남성문화를 활용하면서 유료 딥페이크 프로그램을 살포하고 암호화폐를 벌어들이는 산업은 한편에서는 신산업이고 인공지능 사업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게임 유저가 여성혐오와 약자혐오를 멸칭으로 밈으로 소통하는 것이 기본값이고, 이를 부추기는 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이 지금의 경제라면, 성적으로 어필되는 외모를 신체로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면 사회적 자원과 보상에 접근할 수 없는 여성들이 온·오프라인 착취와 위험 산업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면, 이 신경제는 무엇을 생성하게 될까. 경제와 산업의 회로를 새롭게 설계하지 않으면 일부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도 딥페이크 성폭력은 신산업의 원료가 될 것이다. 성폭력을 민생에서 배제하는 프레임으로는 안 된다.
기본값을 바꾸는 변화가 필요하다. 딥페이크 피해자가 숨죽이지 않고 스스로 가해자를 특정하고 수사를 주도한 것처럼, 여성과 소수자가 주도하는 사회적 배경에서야 새로운 산업이 가능하다. 주거권 등 적극적 복지가 동반되어야 안전 정책이 예방 정책이 될 수 있다. 해마다 10만명의 소녀가 과학기술, 테크 분야 사업장과 연구소 1만곳에 방문하는 독일 ‘걸스데이’ 사례를, 10월 소녀의 날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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