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대러 ‘올인 외교’, 러·일 전략적 타협에 좌절하다
일본과 ‘원만한 타협’을 보기로 이미 방침을 정한 러시아의 반응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로바노프-로스톱스키는 “러시아 정부 관리들이 충분히 검토할 때까지 승인 여부를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민영환은 “너무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 보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교섭’이 아닌 ‘애걸’을 한 셈이었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한반도에서 러·일의 직접 충돌을 불러올 수 있는 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화들짝 놀란 고무라 주타로 주조선 일본 공사가 파천 당일인 1896년 2월11일 보낸 급보가 부산을 거쳐 도쿄에 도착한 것은 이틀 뒤인 13일 오전 11시40분이었다. 절망한 고무라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병력을 사용하는 것밖엔 수단이 없다”고 적었다.
같은 날인 13일치 2신에선 조금 냉정을 되찾았는지 알렉세이 시페이예르 러시아 공사와 만나 “인심이 흉흉하니 양국 병사들 간에 충돌이 없도록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고 알렸다. 상대도 대결을 원하진 않는지 “동감”이라고 반응했다. 그래도 상황은 여전히 일촉즉발이었다. 고무라는 14일치 3신에선 “일·러의 관계는 목하 극히 절박하다”면서 “러시아와 협상을 해 조선 문제를 결정짓는 것은 조금도 유예할 수 없는 긴요한 일”이라고 건의했다.
이를 접수한 도쿄의 사이온지 긴모치 외무대신 임시대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15일 니시 도쿠지로 주러시아 일본 공사에게 상대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게 했다. 알렉세이 로바노프-로스톱스키 외무대신은 16일 찾아온 니시에게 조선에서 보내온 “보고가 극히 불충분하다”면서 “러시아의 장래 방침은 어떤 외국의 간섭도 없이 신속히 조선 내 안녕이 확정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뜻밖의 반응을 확인한 니시는 이번 사건이 “러시아 정부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 같다”고 결론 내린다. 결국, 고종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현장의 러시아 외교관들(카를 베베르 전 공사, 시페이예르 현 공사)이 본국의 정확한 방침을 확인하지 않고, 엄청난 외교적 모험을 벌인 셈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는데 러시아 본국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조선의 운명은 심히 위태로워질 터였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러·일은 곧 타협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본격 협상에 앞서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3월5일 미하일 히트로보 주일본 러시아 대사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러·일은 “조선은 독립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두 나라가 한반도와 관련해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두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갑오)개혁사업은 점차 잘 진척되리라 사료된다”(고무라가 1월21일 사이온지에게 보낸 전문)는 ‘낙관적 전망’을 하고 있었지만, 아관파천 이후 그런 생각은 깔끔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타협은 2단계에 걸쳐 이뤄졌다. 1단계는 현장의 타협이었다. 고무라와 베베르는 5월14일 “국왕의 환궁문제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재량과 판단에 맡기”고, 두 나라 대표는 “관대하고 온화한 인물을 내각의 신료로 임명”하도록 권고하자는 각서(베베르-고무라 각서)에 서명했다. 이때 일본이 큰 관심을 가져온 전신선과 군대 주둔에 대한 합의도 이뤄졌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설치한 서울~부산 전신선은 계속 일본이 보유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최대 200명의 헌병을 배치하도록 했다. 병력에 관해서도 러·일 양국이 거류민·공사관 등의 보호를 위해 조선에 각각 최대 800명을 둘 수 있게 했다. 조선의 주권과 관련된 사항을 두 주변국이 멋대로 결정한 것이다.
2단계 타협은 1896년 5월 말로 예정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라는 외교 이벤트를 활용해 이뤄졌다. 이 무렵 동아시아 3개국에겐 각각 달성해야 할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먼저,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확실한 ‘보호 공약’을 얻어내야 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 역시 일본의 추가 침략에 맞서려면 러시아의 원조가 절실했다. 이에 견줘 일본의 고민은 오로지 조선이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된 조선 내 지위를 회복하려 했다.
각국의 운명이 걸린 이 중차대한 협상에 나서게 된 조선 대표는 민씨 척족의 일원이자 고종의 외사촌 동생인 민영환(1861~1905·35 이하 당시 나이)이었다. 청에선 리훙장(이홍장·73) 북양대신, 일본에선 ‘이익선’ 등을 통해 적극적인 대조선 정책을 주장해 왔던 야마가타 아리토모(58)가 참석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국익 극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상대는 청이었다. 러시아는 이 무렵 1891년 착공한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동청철도)을 만주를 관통해 부설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주고받을 게 분명했던 러·청 협상은 쉽게 끝났다. 러시아의 ‘2인자’인 세르게이 비테(1849~1915) 재무대신과 리훙장은 1896년 6월3일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의 지선(치타에서 하얼빈을 지나 최단거리로 블리다보스토크를 잇는 노선)을 건설하는 대가로 일본이 청, 조선, 극동 러시아령을 공격하면 두 나라가 서로 돕는다는 러·청 비밀동맹을 체결했다.
두번째 상대는 동양의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일본이었다. 러·일의 대표가 첫 회담에 임한 것은 5월24일이었다. 야마가타는 이 자리에서 로바노프-로스톱스키에게 “일·러 양국은 상호 조선국의 독립을 상호 담보한다”(1조)는 것을 뼈대로 한 6개 조의 영문 협정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한반도 내 러·일의 세력권을 남북으로 나누자는 5조였다. “군대를 파견해 이 나라(조선)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경우 일·러 양국은 양국 군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파견 지역을 분획한다. 한쪽은 그 군대를 동 국가의 남부, 다른 한쪽은 북부로 파견한다.”
이 초안을 놓고 러·일이 벌이는 살벌한 협상 과정을 묘사하는 니시의 의견서는 일본외교문서 제31권 제1책 109~116쪽에서 찾을 수 있다. 제안서를 접수한 로바노프-로스톱스키는 이를 읽으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5조에 이르러 말없이 야마가타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니시는 이 부분에 괄호를 치고 “그 뜻하는 바는 아마도 ‘남북으로 나눠 갖자’(南北二分チ取リセヨフ)는 사항 때문인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요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민영환의 차례가 돌아온 것은 러·청, 러·일의 의견 조정이 모두 끝난 뒤인 6월5일이었다. 민영환은 이 자리에서 ①고종을 위한 경비병 제공 ②군사교관 제공 ③한국의 궁내·탁지·광산·철도 사업을 돌볼 고문관 제공 ④조선~러시아 사이 전신선 연결 ⑤(일본에 진 빚을 청산하기 위한) 300만엔의 차관 제공 등 다섯가지 요구 사항을 쏟아냈다. 조선을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일본과 ‘원만한 타협’을 보기로 이미 방침을 정한 러시아의 반응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로바노프-로스톱스키는 “러시아 정부 관리들이 충분히 검토할 때까지 승인 여부를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민영환은 “너무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 보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러시아의 지원을 믿었기 때문에 1894년 (청일전쟁 개전) 이래 일본이 요구했던 모든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왕후는 러시아 쪽에 기울어 친일파의 증오를 산 결과 죽었다”는 내용이 담긴 긴 메모를 건넸다. ‘교섭’이 아닌 ‘애걸’을 한 셈이었다. 조선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 절망스런 상황을 지켜보던 윤치호(1865~1945)는 영문 일기에 러시아인 수행원 스테인의 입을 빌려 “왕과 돌아가신 왕후는 (베베르의) 거짓 약속을 믿고 러시아의 도움을 기다려 왔다”고 적었다.
러·일의 2차 회담이 열린 것은 민영환의 처절한 호소가 있었던 다음날(6일)이었다. 러시아는 1차 회담 때 접수한 일본안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가장 큰 변화는 5조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러·일이 각각 군대를 ‘남북(대략 북위 39도 기준)으로 파견한다’는 부분을 잘라냈다. 일본의 ‘분할 요구'를 거절한 것이었다. 야마가타가 이유를 묻자 로바노프-로스톱스키는 “상세한 내용은 그때(필요할 때) 정하자. 여기서 미리 정하지 않는 게 좋다”고 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니시는 러시아가 조선에 특별한 야심이 없는 것 같다면서 “조선 문제의 결론은 우리(일본)가 바라는 바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역사의 흐름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히 짚어낸 예측이었다. 러·일은 사흘 뒤인 9일 조선에서 양국의 세력 균형을 맞추는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로바노프-아마가타 의정서)에 합의했다.
민영환은 집요한 교섭을 이어가지만,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순 없었다. 스트레스가 상당했는지 윤치호는 16일치 일기에 “민영환이 집이 떠나가라고 한숨을 쉬었다”고 적었다. 러시아는 30일 조선에 군사교관과 재정 상태를 조사할 전문가를 파견하겠다고 답했다. 민영환은 8월 말까지 버텼지만, 더 이상의 도움을 끌어낼 순 없었다. 10월 말 귀국한 그는 ‘애국자’로 변해 있었고, 세인들의 예상과 달리 ‘반러파’가 되어 있었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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