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불 꺼라, 전기세 나간다

안지숙 소설가 2024. 9. 2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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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소설가

과묵하기로 동네에서 따를 자 없었던 우리 아버지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입에 담은 말씀이 있었다. “불 꺼라, 전기세 나간다”는 말이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들은 말이 “불 꺼라”인 날도 있었다. 어떨 땐 환청을 듣고서, 발에 뀄던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내리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1960, 70년대 어른들이 살림살이에서 낭비될까 봐 가장 신경 썼던 게 전기세였지 싶다. 우리 집에는 우물이 있어 덜했지만,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전기세만큼 수도세도 신경 썼다. 식료품을 비롯한 다른 소비재는 내가 지갑을 열어야 돈이 나가는데, 전기세나 수도세는 아차 하는 순간 계량기가 올라가고 고지서가 날아오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전기사용료를 전기요금이 아니라 전기세라고 불렀겠는가. 수도료가 아닌 수도세도 마찬가지.

전기료, 수도료가 많이 나올까 봐 겁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예전과 달리 요즘은 전기와 물을 너무 겁 없이 막 쓴다. 공동생활을 할 기회가 더러 있는데, 공동식당이나 휴게실을 비울 때 전기 스위치를 내리거나 에어컨을 끄고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불 켜진 빈방에서 에어컨은 몇 시간씩 혼자 돌아가는 것이다. 불 꺼라, 환청에 시달리는 내가 끌 수밖에. 당번을 정해 설거지할 때도 보면, 그릇을 물에 담가 씻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설거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수도를 콸콸 틀어놓는다.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던 중 “주차할 데 없어 도서관 주변을 빙빙 돌면서 왜 굳이 차를 끌고 오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차 있는데 타고 가야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친구들도 차 끌고 가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나의 상식이 다른 사람의 상식과 이렇게도 다른가, 하는 ‘현타’가 왔다. 카페가 추워서 소름 돋은 팔을 쓰다듬다가 “왜 카디건을 안 가지고 다니는데”라는 말을 들어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초강풍 에어컨에 대비한 카디건을 가방에 넣어 다니는 게 한국 여성들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니까.

전기와 수도를 막 쓰고, 집 근처 도서관과 문화센터에 차 몰고 갔다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후 위기나 인류세, 에너지 문제와 같은 주제가 대화에 섞여 들면 진지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고 고민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후손을 위한 환경보존과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며 관련 강의도 찾아서 듣고 개인적인 실천 의지도 내보인다. 기후변화로 총괄되는 지구적 위기를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하기는 난망하다는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데도 기꺼이 동의한다.

의지를 내보이고, 동의하는 데까지가 다다. 내 보기엔 그렇다. 비닐봉지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이왕이면 온라인쇼핑보다 동네 상점을 이용하고, 외출 시 콘센트를 습관적으로 뽑고, 생활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트를 활용하는 등의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해 말한다면 그렇다. 생활 속에서 노력해야 할 것들을 대놓고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뜬금없이 웬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고 그러냐는 반응과 마주치게 될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나 자신이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세계여행을 꿈꾸면서 에너지 절약에 대해 운운하는 게 낯 뜨거워서이다. 항공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와 비행운이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내 욕망은 손톱만큼도 포기할 마음이 없고, 내 삶의 편리와 내 몸의 안락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 기후변화니 에너지 절약이니 백날 떠들어봐야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올해처럼 폭염 경고가 내려진 추석이 아니라 열대야로 괴로운 설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에어컨 좀 엔간히 틀자. 전기료 많이 나왔다고 징징대지 말고. 지난여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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