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을 견뎌낸 논들… 다시 누군가에게 넉넉함을 안겨주겠지 [작가와의 대화]

파이낸셜뉴스 2024. 9. 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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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가을들은 내 살점이다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인내심'을 파는 곳이 있다면 어디라도 갈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다른 걸 절약하고 사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난여름은 밥을 넘기면서 이것이 인내심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며 밥을 삼켰다. 여름이라고 자각하는 그 더위의 수위를 넘기는 폭염 때문에 이 가을에 살아남은 것이 감사할 뿐이다.

살아갈수록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나 자신을 나답게 허용하는 범위도 그렇고, 기후문제가 또한 심각하게 그렇다. 아침엔 비닐들을 묶은 봉지를 들고 갈등을 일으켰다. "나 혼자 수고한다고 달라질까." "나 혼자라도." 그러다가 분리수거를 했지만도 결국 아무 흔적 없이 다른 일로 옮겨가고 있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제재소를 열었다. 집이 다 무너진 곳에 새집을 지어야 한다는 열망이었다. 나무를 쓸고 나오는 톱밥으로 소꿉놀이를 했다. 지금도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마을에 조금씩 집이 서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정미소를 열었다. 밥 굶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이유였다. 오래 정미소집 딸로 살았다. 제재소, 정미소에는 여러 일꾼들이 있었고 어머니는 밤 노동을 하는 그들을 위해 밤 1시에 김치와 밥을 넣고 끓이는 국시기(국밥)를 차렸다. 멸치 몇 개를 넣으면 고급이 되기도 했던 그 국시기는 몸이 아프면 그리운 어머니 음식이다. 너무 익숙한 풍경이며 오래 잊혀지지 않는 그림이다.

어느 날 아버지와 논둑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물으셨다.

"달자야 이 논이 뭐로 보이노?" 물론 나는 "쌀밭" 아니냐고 답을 했다.'모'가 '벼'가 되고 그것이 쌀이 되어 우리에게 밥으로 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버지는 말했다. "저 논이 니 아비고 어미다." 저 논이 존재하므로 정미소가 운영이 되고 학교 등록금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웃고 지나갔지만 시인이 되고 시인의 나이가 먹을수록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표정과 아버지 어머니가 논이었다는 큰 비유법이 내 가슴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랬다. 저 논이 없었다면 정미소는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논이야말로 내 어머니요 아버지였다는 것이 나이 들수록 살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래 저 논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늘이 내리는 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비고 어미였던 그 논은 가장 인내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농부가 참으면 논이 참고 논이 참아내면 농부도 참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인내심이 키운 논을 통해 밥을 먹고 학교를 다니며 사랑도 품었을 것이다. 난 추수를 하고 난 뒤의 논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거기서 자연과 인간의 힘을 본다. 그리고 신(神)의 목소리를 듣는다.

지난 1일부터 서울 광화문 교보 글판에 걸린 '종이' 시집의 한 구절을 본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난 후의 가을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이 글판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누구보다 큰 비유법으로 딸의 시심을 자극하시던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아버지와 이 가을 고향 논둑길을 걷고 싶어진다. 저 가을들은 바로 아버지 살점이며 우리 가족의 살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등단하지 못한 시인이라고 난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아버지 일기장을 보았다. 다섯 권이었는데 너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정미소 옆 아버지 사무실에는 고향에서도 가장 우수한 목수가 만든 책상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서랍이 있었는데 아버지 주먹보다 큰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제재소, 정미소 일꾼들은 그 서랍 속에 돈이 가득 들어있다고 했다. "술값이 부족하면 사장님 서랍을 깨나?" 하고 농담을 했고 어머니도 저고리가 사 입고 싶으면 "니 애비 자물쇠나 깨야겠다"라고 했다. 바로 그 자물쇠가 열려있는 것을 본 나의 행운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다.

그 서랍 속에는 돈이 없고 일기장 다섯 권이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돈이 아니라 서랍 속에는 아버지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섯 권의 일기장을 모두 읽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날마다 일기의 첫 대목이 똑 같았다. 여름이건 봄이건 겨울이건 가을에도 일기의 첫말은 같았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혼자 울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돈도 친구도 여자도 많았다. 아니 아버지가 울 일은 뭐가 있으며 왜 혼자인가라는 게 내 의문이었다. 사람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만약 사람 마음을 본다면 뭐가 있을까. 나는 바로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시를 따라 살았고 시인이 되었다.

사실 아버지가 더 좋은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대학시절 방학 때 가을 마루에서 배 하나를 깎아 드시면서 말했다.

"집을 제재소가 해결하고 정미소가 먹을 것을 해결한다면 앞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술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의 이유 있는 돈벌이를.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대학 4년을 졸업하고 바로 경제가 바닥이 났다. 망했다. 이유는 모른다. 너무 감상적인 돈벌이를 감행한 탓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버지는 초라해졌고 어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서울 변두리 김포 주변으로 이사를 했다. 남이 두려워 밤 2시에 트럭에 앉은 어머니는 12시간 김포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눈물은 어디까지일까 그때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엄마 내가 돈 벌게" 말했지만 시인은 돈이 없었다.

지금은 마트에서 쌀을 산다. 가마니로 보던 쌀이 비닐봉지에 들어있다. 지금은 익숙한 장면이다 기적처럼 폭염은 가고 가을이 왔다. 자신이 공들이는 것은 슬픔조차 시간이 지나면 기쁨이 될 것이다 내 밥이 인내심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가을 숨소리를 듣는다.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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