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 정리해고 명단 만드는 인사팀 막내, 그의 눈에 비친 ‘노동’

김은형 기자 2024. 9. 2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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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선배와 친구들을 내 손으로 골라내 회사에서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영화에서 갖가지 명분과 회유로 100명 넘는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원을 받아내놓고 다시 무책임한 결정을 하는 인사결정권자의 모습은 구조조정의 본질을 신랄하게 보여주면서 회사들이 뻔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회생과 발전의 보잘것 없는 허울을 벗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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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야 할 일’ 25일 개봉
영화 ‘해야 할 일’. 명필름랩 제공

몇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선배와 친구들을 내 손으로 골라내 회사에서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노동 영화’라고 하면 해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우는 주인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25일 개봉하는 ‘해야 할 일’의 카메라는 다른 위치에 서 있다. 구조조정 대상자 명단을 만들어야 하는 인사팀 막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는 간단치 않다. ‘위기’라는 손쉬운 명분 뒤에 숨은 회사를 대신해 칼자루를 쥐어야 하는 인사팀이 감내하고 목도하는 건 노동자들의 분노와 원망을 넘어서는 암울한 미래다.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동자와 회사의 대립, 그 사이에 켜켜이 박혀있는 다양한 질감의 비극과 슬픔을 담으며 노동 영화의 새로운 핍진성을 보여준다.

중견 조선회사의 4년차 강준희 대리(장성범)는 인사팀 발령을 받은 직후 구조조정 업무를 맡게 된다. 사수의 지도를 받으며 인사고과와 상벌, 부양가족과 배우자 소득 여부까지 변수로 만들어 대상자 150명의 엑셀표를 완성하지만, 업무에 대한 칭찬은 죄책감으로 쌓인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회사가 살아남아야 노동자들의 미래도 있다’는 관리자의 설득에 꾸역꾸역 가까스로 완성한 리스트는 윗선의 임의대로 난도질된다.

영화에는 노동자의 생존권이라는 큰 주제에 다 담기 힘든 기업 문화의 디테일이 사실적으로 담겼다. 낮은 인사고과가 몰릴 수밖에 없는 업무 구조의 불합리함, 15년 동안 죽어라 일해 가까스로 ‘대리’를 달았지만 전문대졸이라는 차별의 문턱 앞에 결국 무릎 꿇는 동료, 국가기간산업에 헌신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틴 30년의 대가를 희망퇴직으로 돌려받은 아버지에게 가족이 느끼는 미안함 등이 촘촘히 얽혀 관객을 이입시킨다. 회사를 떠나는 아버지 장 부장에게 꽃을 보내고 싶어 연락한 딸의 전화를 받고 텅 빈 사무실에서 끝내 눈물을 쏟는 강 대리의 등과, 그 앞으로 보이는 회의실에서 속마음을 눌러 담은 장 부장이 동료와 웃으며 나누는 공허한 대화가 병렬되는 장면은 관객에게 각인으로 남을 만하다.

영화 ‘해야 할 일’. 명필름랩 제공

이처럼 한 줄기 안에 다양한 갈래의 의미 있는 가지들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박홍준 감독이 실제 조선회사 인사팀 막내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각본에 녹여낸 덕이다. 박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이 만연화된 사회 풍경을 다른 시점에서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구조조정을 겪으면 공적이든 사적이든 조직 안 인간관계에 크게 금이 갈 수밖에 없더라”며 “조직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건데 결정권자들은 이런 본질적 문제를 외면할 뿐”이라고 했다.

영화에서 갖가지 명분과 회유로 100명 넘는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원을 받아내놓고 다시 무책임한 결정을 하는 인사결정권자의 모습은 구조조정의 본질을 신랄하게 보여주면서 회사들이 뻔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회생과 발전의 보잘것 없는 허울을 벗겨낸다.

신인 감독을 발굴해 참신한 기획을 개발하는 명필름랩이 제작·배급했으며, 주인공 강 대리를 연기한 장성범은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 지난해 주요 영화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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