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원주 나무 기행
(시사저널=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강원도 원주의 산천을 오래도록 굽어보았을 나무들, 그 신령한 존재를 마주하러 간다.
마른 가지에서 잎을 틔우고는 다시 헐벗은 모습으로 돌아간다. 오랜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생장해 온 나무, 나무들. 믿음과 직관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던 아득한 과거, 뭇사람에게 나무는 우주 질서의 표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지키던 신령한 나무를 '보호수'라 일컫는다. 역설적인 명칭이다. 보호수는 산림보호법에 따라 수종별 나이·키·둘레 기준을 충족하는 개체를 지정해 관리하는 제도이자 이 제도를 통해 보호받는 나무를 가리킨다. 어림잡아 수령 100년에서 200년 사이의 노거수라면 보호수일 확률이 높다. 희귀목이나 전설이 깃든 수목, 증식 가치가 충분한 수목은 기준에 못 미치더라도 보호 대상이 된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는 살아 있다
당산목으로 흔한 은행나무는 보호수 지정 기준이 월등한 수종이다. 수령 400년, 수고 20미터, 흉고직경 2.6미터를 넘어야 하는데, 은행나무가 워낙 질병에 강해 수명이 긴 데다 줄기 또한 곧게 자라 풍채가 좋은 편이다. 분류학적 내력과 생물학적 특징 또한 고유하다. 고생대 페름기에 등장해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을 이뤄 온 은행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위용을 자랑하며 지구의 역사를 굽어본 '살아 있는 화석'이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에 가면 은행나무, 아니 은행나무'님'이라 불러야 마땅한 존재가 자리해 '계신다'. 1964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높이 32미터에 둘레 16.27미터, 추정 수령 800~1000년에 달한 경이로운 생명체. 거대한 연체동물의 다리처럼 줄기와 뿌리가 위아래로 얽혀 기묘한 모습으로 자라났으니, 나무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숲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사방으로 뻗은 길고 묵직한 가지는 여러 개의 받침대에 얹혔으며, 넓게 드리운 그늘은 어딘가 영적인 기운에 휩싸인 채다. 군데군데 커다란 옹이가 나무의 시간을 증거한다.
무수한 재난과 기상이변을 이겨 내고 맨몸으로 살아남은 이 나무는 11세기 무렵 출현해 21세기의 인류를 맞닥뜨린 셈이다. 이 사실이 도저히 실감 나지 않아서, 스님의 지팡이가 뿌리내려 나무가 되었다는 신통한 전설을 믿어 보기로 했다. "줄기와 가지가 균형 있게 자라 보호 중인 전국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알려졌다." 울타리 안내판에 적힌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긴다. 아무렴, '가장'이란 최상급 표현에 걸맞은 아름다움이다. 이 나무의 절정을 가을이라고들 하지만, 늦여름의 짙은 녹음이 뿜어내던 고요하고도 맹렬한 숨결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소금산 소나무의 꼿꼿함을 배우다
이제 섬강 물길을 따라 걸어 나갈 차례. 삼산천 계곡의 준봉이 펼쳐진 지정면 간현리는 마을 전체가 한 폭의 수묵화다. 앞서 이곳을 지나친 수많은 이들도 유려한 풍경을 칭송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 중기의 청백리 간옹 이희 선생이다. '더 나아가기를 그치고 머무른 고개'란 뜻에서 그칠 간(艮), 고개 현(峴) 자를 이름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관동 지역을 구경하고 쓴 가사 '관동별곡'은 섬강의 절경을 찬탄한 문장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간현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소금산 그랜드밸리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 울창한 숲이 이어진 등산로 덱을 올라 높이 100미터, 길이 200미터를 자랑하는 소금산 출렁다리에 다다른다. 걸음걸음마다 출렁이는 마음을 간신히 가눈 채, 깎아지를 듯한 계곡과 시원스러운 하늘을 두 눈 가득 담는다.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어도 계곡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맑고 차가운 바람이 새로운 계절을 느끼게 한다.
소금산 정상부 벼랑에 설치한 360미터 길이의 소금잔도는 출렁다리만큼 큰 감동을 안긴다.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기암괴석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벼랑 끝에 매달린 소나무가 신기해서 한동안을 넋 놓고 감상하기도 했다. 돌 틈에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은, 고독한 무사 같은 소나무. 비바람과 눈보라를 버티고도 저토록 꼿꼿하다.
그래서일까. 옛 사람들은 사계절 푸른 소나무를 두고 절개와 신념을 논했고, 현대 한국인 또한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소나무를 꼽으며 여일한 애정을 표현해 왔다. 국립산림과학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소나무를 선호하는 이유로 아름다운 외양과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꼽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만큼 인간의 삶 가까이 맞닿은 나무도 없다. 가로수나 방풍림으로 유용한 것은 물론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데에도 쓰이니,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소나무 아닌가.
"'작은 금강산'의 풍광이 참 대단하죠?" 문화관광해설사 양한모 선생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는 이곳에서 나무를 올려다볼 수도, 내려다볼 수도 있어 좋다고 했다. "서로 독려하듯 옹호하듯 자라난 소나무를 볼 때 가슴이 뭉클합니다. 새로 맺는 솔방울을 보면서 또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체감하기도 하지요." 그의 모든 말마디가 솔잎처럼 향기로웠다.
강원감영 느티나무와 버드나무 사이에서
소금산, 소금강, 금강석, 금강송. 이 네 단어의 공통점은 최고를 뜻하는 '금강'에 있다. 누가 뭐래도 산 중의 산은 금강산. 금강산은 한국적 이상향의 극치다. 오죽하면 조선 시대 강원도 관찰사는 집무실인 강원감영 한편에 삼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모티브로 후원을 꾸며 놓고 금강산의 영주를 자처하며 신선 놀음을 즐겼다 한다. 이 대목에서 금강산 소재지가 강원도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려 본다.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강원도의 구심점 원주에 강원감영이 들어섰다. 어엿했던 건물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모두 소실되었으나 지금껏 자리를 버텨 온 유일한 것, 바로 후원에 자리한 느티나무다. 1982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고 25미터, 둘레 6미터, 수령은 약 600년으로 기록됐다. 조선 왕조 500년을 지켜보고도 한 세기를 더 산 나무다.
나무 그늘 아래서 신선처럼 부채질을 하는 문화관광해설사 박성남 선생에게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청했다. "600년 넘는 세월을 건너 지금껏 묵묵히 생명을 유지해 왔으니 얼마나 귀한 나무입니까. 몇 해 전 나무를 치료하느라 가지 한쪽에 보철을 해 넣었는데, 속이 빈 탓인지 단풍이 빨리 드는 게 특징이랍니다. 여기 보세요. 끝에 달린 잎이 벌써 노랗게 변했죠."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희한하게 생긴 옹이에 얽힌 세속적 미신에서부터 옛 정선군수 오횡묵이 쓴 을 토대로 후원을 비롯한 감영 건물 전반을 복원했다는 흥미로운 역사까지, 잔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그의 재담에 감탄을 연발했다.
모든 것이 느리고 온화하게 흘러가는 늦여름 한낮이었다. 연못가의 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릴 때, 나이를 잊은 느티나무 어르신은 팽팽한 가지를 한껏 펼쳐 보였다. 팔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빛이 스며들자 별안간 떠오른 단어, 볕뉘. 작은 틈을 통해 비치는 햇빛을 가리키는 고유어다. 이 계절의 나무들이 만들어 준, 보석 같은 볕뉘의 시간을 되새긴다.
풍요로운 원주의 맛
한나절 부지런히 걸었으니 허기를 달랠 때. 원주 도심 한복판에 가면 중앙동 전통시장 먹거리 골목을 맞닥뜨린다. 이곳에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 온 만두 가게 여럿이 죽 늘어서 있다. 이들은 육수에 삶아 풍미를 살린 '건진만두', 칼국수와 만두를 합친 '칼만' 등 맛깔스럽고 개성 넘치는 메뉴를 선보인다. 원주 만두의 저력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다면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펼쳐질 원주만두축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중앙동 전통시장과 문화의 거리, 지하상가 일원에서 열리는 축제는 20만 명이 모인 지난해보다 한층 화려하고 풍성한 이벤트를 마련한다.
고깃집이 즐비한 중앙시장 1층 소고기 골목은 '석쇠 골목'이라고도 부르는 명소다. 숯불 화로에 석쇠를 올려 친환경 방식으로 사육한 치악산 한우를 구워 맛본다. 치악산 한우는 보리를 첨가한 양질의 사료를 먹인 까닭에 지방 조직이 단단해 맛이 좋기로 유명한데, 이곳에선 아롱사태와 제비추리 등 특수 부위까지 합리적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치맛살, 업진살, 부챗살, 차돌박이로 구성한 모둠구이도 인기 메뉴. 갈빗살, 살칫살, 안창살, 안심추리가 뒤를 잇는다.
그런가하면 떡볶이, 순대, 튀김, 돈가스, 칼국수 등 값싸고 맛 좋은 분식 메뉴가 모여든 자유시장 지하 1층은 또 어떤가. 매콤달콤한 떡볶이에 각종 튀김을 버무려 먹으니 학창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걸쭉하게 졸인 떡볶이 국물에 김밥과 순대를 적셔 먹는 것도 별미. 1만 원으로 한 끼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요즘, 이곳에선 떡볶이와 튀김 범벅 2인분에 김밥 한 줄까지 더해도 1만 원에서 500원이 모자란다. 마음껏 배를 불린 뒤 시원한 국물로 입가심을 하고, 새로운 여정에 나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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