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 ‘계급’을 끼얹자 감칠맛이 더해졌다…韓, 홍콩 이어 동남아도 잡았다
17일 공개 이후 7일째 국내 예능 1위
홍콩, 싱가포르 1위, 말레이시아 2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구독자 140만 명의 요리 유튜버 승우 아빠, 50년차 중식 대가 여경래의 수제자인 ‘중식여신’, 맛과 균형을 모두 잡은 ‘급식 대가’….
시작은 여느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았다. 80명의 ‘은둔 고수’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참가자들은 “유명한 사람들은 다 나왔다”며 경계와 호기심 섞인 눈빛을 두루 보냈다. 이들 80명은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지만, ‘흑수저’로 명명됐다. 맞춤법은 다르나, 발음상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누구라도 떠올릴 법한 금수저의 대척점으로의 ‘흙수저’(부모의 자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른 사회경제 계층을 분류한 수저계급론에서의 최하위 계층), 바둑에서의 ‘흑돌’(바둑에선 실력자, 연장자가 백돌을 잡는다)의 의미를 두루 담았다.
흑수저 80명이 모두 모이자, 이들을 내려다보는 스무 명의 백수저가 등장한다. 20명의 스타 셰프의 ‘등장신’은 연출의 묘를 발휘했다. 우월하고 월등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2층 테라스에서 등장한 이들은 이미 ‘셰프들의 셰프’였다. 미국을 사로잡은 세계적 셰프인 ‘2010 아이언 셰프’ 우승자 에드워드 리, 중식 대가 여경래, ‘한식대첩2’ 우승자인 조영숙,‘딤섬 여왕’ 티엔미미의 정지선, ‘마스터 셰프 코리아2’ 우승자 최강록, 이탈리아 미슐랭 1스타 오너 셰프 파브리 등 20명이다. 넷플릭스의 첫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요리 계급 전쟁’이다.
“우리 그렇게 짜치지 않는다” vs “그동안 우리가 쌓아온 것이 있는데 당연하다”
‘계급’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누구도 대놓고 구분짓지 않았다. ‘계급의 실체’를 요리에 끼얹자, 뻔한 서바이벌엔 감칠맛이 더해졌다. 넷플릭스의 첫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요리 계급 전쟁’이다.
24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흑백요리사’는 넷플릭스가 1∼4부를 공개한 17일부터 6일 연속으로 국내 1위를 기록 중이다. 싱가포르에선 19일부터 5일 연속 1위, 홍콩에선 지난 20일부터 나흘 연속 1위, 말레이시아에선 20~23일까지 2위, 24일 현재는 3위에 올랐다. 인도네시아에서도 20일부터 나흘 연속 3위에 올랐다. 미국에선 7위에 안착했다. 총 12부작 중 현재까지 총 4편이 공개된 프로그램은 이날 5∼7부, 내달 1일 8∼10부, 내달 8일 11∼12부가 공개된다.
‘흑백요리사’는 흔하고 뻔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약간의 향신료를 더해 완전히 색다른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초반 형식은 여느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았다. 출연자 소개부터 경쟁 구도를 만들고, 그들의 이력을 흥미롭게 엮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감을 조명했다. 흑백 요리사가 총 100명이 모였지만, 이들이 시작부터 같은 경쟁을 했던 것은 아니다. 백수저는 첫 대결부터 ‘어드밴티지’를 받았다. 80명의 흑수저가 두 명의 심사위원에게 초스피드 ‘심사’를 받아 20명을 선발할 때, 이들은 부전승으로 프로그램에 안착했다.
백수저 군단과 흑수저 군단을 심사할 두 명의 심사위원은 대한민국 ‘요식업 대부’ 백종원과 대한민국 유일의 미슐랭 3스타 주인공인 모수의 안성일 셰프다. 심사위원마저 은근히 흑(백종원)백(안성일) 구도를 만들었다. ‘장사왕’ 대 ‘파인다이닝 끝이자 셰프들의 꿈’의 구도였다.
두 심사위원이 80명의 흑수저 중 백수저와 대결할 20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안성재 셰프는 깐깐하고 까다로웠다. “채소의 익힘 정도”부터 음식 전체의 간의 조화, 고기의 굽기 정도, 식감 등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요리의 모든 요소를 날카로운 미각으로 심사했다. 백종원은 스스로 늘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난 요리사가 아니”라며 “다른 어떤 조건보다 무조건 맛으로 판단하겠다”고 했다.
흑수저는 말 그대로 ‘재야의 고수들’이다. 백종원과 같은 ‘요식업 1인자’를 꿈꾸는 장사 천재부터 숨은 손맛의 강자들 등 전국의 ‘무명 요리사’들을 지칭한다. 이 프로그램의 제목 역시 애초엔 ‘무명요리사’로 기획됐다.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흑수저 요리사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별칭으로 불린다. 단지 이름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각자의 위치에서 일가를 이룬 요리사들이 적지 않았기에 20명을 가리는 흑수저들의 요리대전은 백수저 셰프들 사이에서도 감탄을 끌어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요리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존중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백수저의 모습에선 ‘계급론’을 가져온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예사롭지 않은 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흑수저 중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 안성재 셰프의 모수에서 함께 일한 요리사들도 출연했다. 이들은 심사위원도 흑백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은 백종원에 대해 “나의 요리는 과정이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 백종원 심사위원은 직관적인 맛을 선호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며 “그 분이 내 요리를 다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성재 셰프가 심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흑백요리사’가 가져온 계급론과 편견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언더독’으로 대표되는 흑수저 요리사로 출연했으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출신이자 소위 ‘요리 엘리트’라는 우월함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백종원을 향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게 만들었다. 그의 요리를 맛본 백종원은 “요만한 요리에서 엄청난 맛이 난다”는 평으로 반격(?)했다.
이 장면을 제외하면 ‘계급론’을 가져온 프로그램은 기존의 계급주의를 향한 저항도 뒤집었다. 영민한 시청자들은 권위적이고 거만할 줄 알았던 백수저 셰프들의 예상밖 모습에서 이 프로그램이 자극적인 계급 서바이벌이 아니라는 점을 1회부터 확인했다. 차분하고 겸손하며 점잖은 화법으로 흑수저 셰프를 응원하고, 진중하게 경쟁에 임하는 백수저 셰프들을 도리어 더 지지하게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1000여벌의 조리도구와 첨단의 기구, 신선한 재료를 완전히 새로운 요리로 탄생시킨 미식 대결은 넷플릭스의 압도적 자본력과 쫀쫀한 연출로 새로운 요리 서바이벌의 장을 열었다.
프로그램은 곳곳에서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흔적이 묻어났다.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스튜디오, 동시에 80명이 요리를 할 수 있도록 구축된 세트는 천편일률적이었던 백색 조명 아래에서의 요리 대결을 한 편의 쇼로 뒤바꿨다. 매회차 1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지만 호흡은 빨랐다. 각각의 요리사들의 요리 과정, 참가자들의 반응, 심사평을 두루 담아내며 속도감있게 전개했다. 기존의 계급 서바이벌이 가지는 자극적 편집이나 발언과 같은 고질적 병폐도 아직까지는 도드라지게 나타나진 않았다.
지난 4회까지 공개된 프로그램은 이제 본격적인 ‘계급 전쟁’에 돌입했다. 흑백요리사가 일대일 대결을 벌여 서로의 계급을 뒤바꾸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중이다. 심사 방식마저 기발하다. 두 심사위원은 눈을 가린 채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하고 일대일 동률이 나올 때만 치열한 논쟁을 거쳐 승자를 가린다. 백종원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안성재 셰프를 초대, “의외로 2대0 으로 의견이 모아진 때가 많아 신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화제성은 이미 온라인에서 입증되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엔 벌써부터 흑백 요리사 예상 진출자까지 추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윤현준 CP(스튜디오 슬램 대표)도 탈탈 털렸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스타 PD’ 나영석과 비교하며 그의 전작들을 나열, ‘또 다른 차원의 예능신’이라는 수사까지 붙었다. ‘쟁반노래방’부터 ‘슈가맨’, ‘크라임씬’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전작이 공개되자, 흥미로운 피드백도 나왔다. “두 심사위원이 감옥에서 심사를 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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