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산업정책의 교차로…한국의 길은? [세상읽기]
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미국은 대중 전략경쟁의 성패를 좌우할 첨단 반도체의 위탁생산(파운드리)을 동아시아에 의존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2022년 ‘반도체법’을 도입했다. 한 나라의 특정 기업이나 업종 지원을 위한 정부 개입을 뜻하는 ‘산업정책’ 부활의 대명사다. 동법은 미국 기업 인텔을 최대 수혜자로 점지했고 티에스엠시(TSMC)와 삼성의 미국 투자도 이끌었다.
하지만 법 시행 2년째를 맞은 지금, 미국 반도체 부활을 겨냥한 산업정책에 적신호가 켜졌다. 인텔은 2018년 7나노에서 멈춘 파운드리 기술의 정체를 못 이겨 분사를 결단하였다. 티에스엠시는 고급 엔지니어 부족, 미국의 노동 관행과 조직 문화에의 부적응, 급등한 건축비 등으로 양산 개시 시점을 계속 미루고 있다. 삼성도 저조한 수율과 싸우더니 결국 최소 인력만 남겨두고 협력사와 함께 일시 철수했다. 이로써 미국은 비효율적 자원 배분, 그로 인한 재원 낭비와 고비용 구조 고착이라는 전형적인 산업정책의 폐해를 겪을 위험에 처했다. 단, 아직은 예견된 실패보다 예견된 난관에 가깝다. 미국의 다음 수순에 모두가 주목하는 이유다.
산업정책의 기원은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근래 한동안 잊혔다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23년 기준 산업정책 조치가 2500건 이상에 이르러 국가 간 보조금 경쟁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이 중 3분의 2 이상이 차별적인 무역 왜곡 조치고, 약 절반이 미국, 중국, 유럽연합(EU)이 도입한 것이며, 3분의 2가 녹색 전환, 공급망 회복력, 안보 등 전략적 목표가 주를 이룬다(IMF and Global Trade Alert, 2024). 그런데 이렇게 많은 것이 과연 성공할까? 해답의 실마리를 미국의 반세기 산업정책사에서 찾아보자. 미국이 1970년 이후 도입한 18건의 중요한 산업정책 조치 중 긍정 평가를 얻은 경우는 산업과 기업을 선별 않고 연구개발을 촉진한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다르파) 설립과 육성 정도다. 미국 반도체의 발전은 다르파 성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반면 쇠퇴 산업의 인위적 부활을 위해 보호무역 조치와 결합한 산업정책은 거의 실패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각에서 두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위기의 인텔에 대한 미국의 플랜 비는 뭘까? 미국의 인텔 구하기가 혹시 성과를 얻는다면 삼성의 글로벌 파운드리 2위 지위는 위태로워진다. 하지만 인텔의 현 상태를 고려할 때 미 정부의 인텔 지원은 채찍 없는 당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그때 미국의 플랜 비는 티에스엠시와 삼성이 될 것이나 이 역시 최대 수혜자는 인텔과 마찬가지로 고객과 경쟁해야 하는 삼성보다 그렇지 않은 티에스엠시가 아닐까. 어느 경우든 삼성에는 호재보다 악재이며, 일본이 그랬듯이 미국도 경제안보라는 미명하에 이들 미국 법인의 일부 지분 매각을 요구하지 말란 법도 없다.
둘째, 미국의 역사적 사례에 비춰볼 때 한국 산업정책의 길은 뭘까? 냉정히 말하건대 한국의 파운드리 전망은 불투명한 가운데, 메모리 강자의 지위 유지도 쉽지 않다. 반도체 제조의 경쟁력이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동진해왔듯이 언젠가는 중국으로 갈 운명이다. 이미 한국은 제조업 전반의 지반 침하가 불가항력의 흐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앞에도 왕도는 없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대체불가 고부가가치 품목으로의 전환만이 예정된 미래를 늦출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개방적인 국내 제조혁신 생태계 조성과 사전에 승자를 지목하지 않는 연구개발 촉진, 연구자 우대가 관건이다. 연구계 카르텔을 소탕한다며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근시안적 접근으로는 연구 인력과 기술을 경쟁국에 안길 뿐이다. 2023년 산업기술 유출 사건 총수는 28건으로 최근 5년간 최대를 기록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반도체 기술이었고 3분의 2가 중국으로 넘어갔다.
아울러 강대국과의 보조금 경쟁에서 이길 재간이 없는 한국은 이것이 초래할 무역분쟁 악화를 경고하며 규범에 기반한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기 위한 국제 협력에 나서야 한다.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신규 시장 창출, 중견국 연대 강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알셉) 내 중국의 국제규범 준수 여건 조성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단, 지지율 20%의 위태로운 정부로는 중장기 전략 기획이나 무역협정 체결도 어렵다. 시계 제로의 글로벌 환경 극복에도 정국 안정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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