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36] 386과 닭발
‘입스(Yips)’란 스포츠맨이 특정 운동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뜻한다. 야구에서는 ‘스티브블래스증후군(Steve Blass Syndrome)’이라고 한다. 1971년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우승을 이끈 우완 투수 이름에서 유래했다. 뉴욕 양키스 1루수 핸리 루이스 게릭이 루게릭병 환자였듯이 스티브 블래스는 스티브블래스증후군을 앓았다. 한국 은어(隱語)로는 ‘닭발’이다. 류현진이 ‘닭발에 걸리면’ 야구공을 아예 못 던지거나 아무 데나 막 내던지게 된다.
황당 그 자체다. 심리적이라지만, 원인이 불분명하고 치료법도 딱히 없다. 홀연 나타났다가 저절로 사라지는데, 죽을 때까지 괴롭히기도 한다. 인간은 마음에 휘둘리는 영적 존재인가 보다. 20여 년 만에 만난 대형 입시학원 원장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살이 쪘고, ‘엄청난 부자’가 돼 있었다. 평범한 문학도를 자본주의의 초고위층으로 끌어올린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의 위대함이 막상 내 눈앞에 있으니 신기했다. 고소득 납세자가 흠이 될 리 없고 축하할 일이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을 안 내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한데, 나는 그가 기이했다. 연신 그는 민주화 투사처럼 말하고 사회주의자 같은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정반대로’ 살고 있으면서. 오래 전 나는 사회주의자 돼 보는 게 로망이었는데 요즘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라는 인간들 중에 사회주의자를 발견해보는 게 버킷리스트다. 그와 나는 ‘386′의 막내 격인 89학번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무슨 민주화운동? 게다가 전두환의 적이었을 뿐 1980년대 (학생) 운동이 ‘자유’ 민주주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거나 주로 주사파 운동이었다는 사실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대중만 잘 모르는 진실이다.
심지어 그는 운동권도 아니었다. ‘대학생 한량(閑良)’이었을 뿐이다. 1990년대 한총련 세대까지 민주화 어쩌고 하는 ‘환각형(幻覺型) 거짓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조카뻘들에게 분뇨 같은 ‘X86′이라고 불리며 혐오의 대상이 된 우리 죄가 크다. 진짜 운동권보다 더 환자 같은 가짜 운동권들이 ‘X86의 바다’를 이룬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민주화 세대이자 진보 세력이었다면, 1987년 이후에는 북한 강제수용소 해방운동,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우리의 ‘결정적 자기모순’이다. 민주화 운동 세대가 아니라 ‘민주화 격변기 세대’ 정도가 적절하다.
그와 헤어지며, 이념이 아니라 ‘시대’가 마음과 영혼을 염색한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7080가요’ 같은 거다. 가난한 내가 진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그의 재산을 뺏어버릴까 하는 ‘개그 같은 생각’도 잠깐 했다. 아버지, 삼촌 세대가 자기들처럼 말하고 행동했다면 쓰레기 취급했을 인간들이 자기들에 대한 비판에는 ‘닭발이 걸려버린다.’ 가장 혜택받았으면서 희생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 세대. X86은 ‘닭발 세대’다. 언젠가 이 병이 사라지기는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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