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유령’ 계엄 의혹과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손효주 기자의 국방이야기]
A 중령은 최근 야당 일부 의원들이 제기하는 ‘계엄 준비 의혹’에 대해 “불쾌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다른 군인들도 비슷했다. “군을 모독하는 행위”라거나 “황당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B 소령은 “의미 없는 정쟁에 군을 끌어들이지 말라”며 반발했다. C 장성은 “군이나 정부가 계엄을 모의했다는 증거를 하나라도 가져와 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 달 1일 국군의날을 맞아 우리 군은 시가행진을 진행한다. 40년 만의 2년 연속 시가행진이다. 올해는 아예 국군의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는데, 34년 만이다.
이례적인 결정의 이유 중 하나는 국군의 사명감과 자부심을 높일 계기가 필요해서다. 이는 군의 사기 저하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국민의 성원을 체감할 수 있는 시가행진 같은 축제의 장을 자주 만들면 군인들 사기가 진작될 것이란 기대가 높다.
그러나 계엄 의혹으로 축제 전 기대에 부풀어야 할 군인들 일부는 사기 저하를 호소하고 있다. 한 장교는 “전시에 목숨 걸고 국민을 지킬 군인들이 여차하면 국민에게 총구를 겨눌 ‘잠재적 계엄군’ 취급을 받고 있다. 군을 국민의 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
실제로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정부가 국군의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건 계엄 선포 사전 작업이라는 괴담이 떠돈다. 시가행진 참여 부대는 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 임무 수행군으로 임무가 바뀌고, 전차 등 국방력을 자랑할 무기들은 그대로 도심에 배치돼 국민 진압에 쓰일 것이란 시나리오다. 야당 일각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에 기대 제기한 의혹이 다양한 괴담으로 각색돼 몸집을 키우면서 국민의 불안을 부추기고 군에 대한 불신까지 조장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내 친야 성향으로 분류되는 예비역 대장들도 실소했다. 예비역 대장 A 씨는 “2024년에 무슨 계엄이냐”며 “병사들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어 정보가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만큼 계엄 시행 준비 과정에서 시행도 못 해보고 폭로될 것”이라고 했다. B 씨는 “전시 계엄 수행 절차는 한미 연합연습 때 연습하지만 평시 계엄은 연습 자체가 없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평시 계엄 시행 명령을 따를 지휘관이 몇이나 되겠나”라고 했다. 실제로 군은 1992년부터 전시 계엄 수행 절차만 연습을 하고 있다.
더욱이 우려되는 건 계엄 의혹 공세의 총구가 최근 국군방첩사령부를 향한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계엄 준비 음모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군기 문란의 실무 핵심인 여인형 방첩사령관의 해임을 요구한다”고 했다. 민주당 김민석 의원은 22일 “여 사령관 최우선 척결”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그를 ‘척결’해야 할 사유는 모호하다. 여 사령관이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충암고 출신이고 계엄 선포 시 방첩사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맡은 서슬 퍼런 직책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된다는 점 등이 근거라면 근거일 순 있겠다. 방첩사의 또 다른 전신 기무사가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 유족 사찰이나 계엄 검토 문건 작성 등으로 논란이 된 점도 ‘척결’ 주장의 이유로 볼 순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조직의 ‘원죄’에 근거한 추정일 뿐이다. 척결을 주장하려면 그가 계엄 모의에 가담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지만 ‘카더라’ 수준의 추측이 전부다.
최근 방첩사는 국군정보사령부 군무원의 블랙 요원 명단 등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수사하며 군무원을 구속했다. 북한과의 연계성 밝히기에도 주력했다. 군 간부들이 암구호를 알려주고 사채를 쓴 사건도 올 초 방첩사가 먼저 인지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방첩 수사 등을 진행하며 군기 유지 임무를 하는 부대 수장인 여 사령관을 정반대로 군기 문란 핵심으로 규정하려면 ‘그 자리가 과거에도 문제가 된 자리’라거나 ‘대통령 후배’라는 식의 주장만으론 부족하다. 국가보안법 등에 근거해 군내 간첩 수사를 실시하는 방첩사의 수장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난타당하는 모습을 가장 환영할 이는 방첩사 존재 자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북한이다.
북한은 최근 핵물질 제조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했다. 대남 핵타격 미사일도 발사하고 있다. 오물풍선은 일상처럼 날아든다. 국방력을 조금도 허투루 써선 안 될 엄중한 안보 상황에 우리 군은 실체 없는 계엄 의혹 포화 속에 의혹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느라 소모되는 듯하다. 마지막 계엄이 선포된 1979년과 45년이 지난 현재 군의 위상이나 사회 시스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유령 의혹’은 힘을 잃는다. 우리 군이 더 불필요하게 소모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손효주 정치부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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