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암구호

정우상 논설위원 2024. 9. 23.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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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군(軍)에서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암구호(暗口號)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낮에는 눈으로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있지만 밤이 문제였다. 지금과 달리 로마 시대 암구호는 문장 하나로 이뤄졌다. 황제나 장군들이 직접 암구호를 정해 내려보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승리의 여신 비너스’, 폼페이우스는 ‘불굴의 헤라클레스’ 이런 식이었다. 서사시의 한 구절을 암구호로 정한 황제도 있었다. 로마군이 되려면 암기력도 좋아야 했을 것 같다.

▶노르망디 상륙 때 암구호는 플래시/선더(flash/thunder)였다. 섬광과 천둥이라는 뜻이다. 독일인들이 영어식 th 발음을 할 수 없어서 th가 들어간 선더를 암구호로 정했다고 한다. ‘밴드오브브라더스’를 포함해 노르망디 전투를 다룬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이 암구호 장면이 나온다. 이때도 암구호는 3일마다 변경됐다. 낙하산병들은 암구호 대신 금속 딸깍이(Cricket Clicker)로 소리를 내 피아를 구별했다.

▶암구호와 사투리 관련 우스개를 다룬 창작 판소리가 있다. 암구호는 자물통과 열쇠였다고 한다.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자물통?” 하면 “열쇠”라고 답해야 한다. 그런데 전라도 병사는 ‘열쇠’ 대신 ‘쇳대’라는 사투리로 답을 했다. “쇳대도 긴디(맞는데)...”라며 망설였다는 것이다. 한 6·25 참전 용사는 “그때는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아 매일 암구호를 정해도 외우지 못했다”고 했다. “어이”라고 물어 “동무”라고 하면 인민군으로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암구호의 생명은 보안이다. 암구호는 영어로 ‘password’, 즉 비밀번호다. 2014년까지는 군단별로 자체 암구호를 썼지만 지금은 전군이 같은 암구호를 쓴다. 합참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 치를 전군에 하달한다. 매일 정오 기준으로 24시간 동안 쓰고 바꾼다. 3급 비밀로 규정된 암구호는 전화로는 전파할 수 없고, 유출되면 즉시 폐기해야 한다.

▶몇 년 전 병사들에게 휴대전화가 보급된 이후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암구호를 공유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암구호를 못 외워 질책을 받던 한 병사는 여자 친구와의 대화방에 암구호를 보내 수시로 확인하다 적발됐다. 암구호 전파 업무를 담당하던 병사는 “나 소대장인데”라는 휴대전화를 받고 암구호를 알려줬는데 실제는 소대장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는 장교가 사채업자에게 암구호를 알려준 사실이 드러났다. 사채업자가 신뢰를 쌓자면서 암구호를 요구했다는데, 무너진 군 기강이 혀를 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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