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경제 항산항심] 한국 벤처재벌의 성장통
한국 경제에 벤처 붐이 시작된 시기는 외환위기가 닥친 1990년대 후반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분 IT 열풍을 타고 한국에서도 벤처기업 창업이 줄을 이었다. 다음 카카오 네이버 안랩은 당시 탄생한 대표 벤처기업들이다. 당시 코스닥 시장에 자본이 몰리면서 벤처기업들은 단숨에 시가총액 수조 원대 회사로 발돋움했다. IT를 기반으로 한 벤처기업의 급성장은 한국 경제의 산업구조에도 변화를 몰고 왔다. 제조업과 수출 중심의 전통 대기업과 더불어 우리 경제를 이끄는 또 다른 축으로 자리 잡았다.
벤처 붐이 몰아친 지 한 세대가 흐르면서 한국 재계 판도도 변화했다. 올해 공정위가 발표한 자산 5조 원 이상의 대기업집단을 보면 88개 기업집단 중 10곳이 구멍가게 수준의 벤처기업에서 출발해 성공을 거둔 곳이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쟁쟁한 전통 재벌그룹을 제치고 상위 30위 안에 들 만큼 몸집이 커졌다. 이들이 영위하고 있는 IT 사업의 확장성과 성장성을 감안하면 향후 10년 안에 한국 재계에서 최정상에 더욱 근접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성장통’이라고 해야 할까.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국 벤처 재벌들은 현재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벤처 재벌들이 위기라고 부를 만큼 중대한 기로에 선 까닭은 몇 가지 안팎의 도전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출발할 때 가지고 있던 벤처정신이 점차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고, 외부적으로는 산업적으로 시장 지배력이 커지고 공룡으로 몸집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제도권의 통제영역에 진입함에 따라 사회적, 경제적 통제시스템의 영역에 들어선 점이다.
벤처 재벌들이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도전정신’으로 요약되는 벤처정신이 점차 퇴색되고 있는 점이다. 사실 벤처 재벌의 성장 원동력은 인터넷과 IT 산업의 급속한 발전이지만 더 중요한 동력은 상식을 파괴한 과감한 도전정신이었다. 더불어 학력 인맥 가문 재력의 기득권을 탈피한 ‘괴짜정신’이 그 모태였다. 하지만 거대 기업의 반열에 오르고 부의 제국에 갇히면서 초심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창업하기보다 우량기업을 돈으로 사냥해 몸집을 불리는 늑대 사냥꾼으로 변했다. 과거 전통 재벌들이 자행하던 문어발 확장방식을 흉내 내고 있다.
벤처 재벌들이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위협은 성장방식과 경영방식의 괴리다. 기업의 경영방식은 소규모일 때와 거대기업일 때 확연히 달라야 한다. 몸집은 재벌급인데도 소수 두뇌집단에 의해 사업과 의사결정이 독주되고 시스템 경영은 정착되지 못했다. 시장 지배력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회적 견제가 거세진 점에 대한 대처도 미흡하기 그지없다. 독점적 지위를 용인해 준 초기 성공방식은 경쟁자의 등장과 기득권의 견제로 유효기간이 끝난 지 오래다.
어쩌면 현재 벤처 재벌들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한탕주의에 매몰된 투기자본에 큰 책임이 있을 것 같다. 몇몇을 제외하면 한국 벤처기업의 상당수는 훅 불면 꺼질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인다. 실제 벤처기업이 주를 이루는 코스닥 상장사를 보면 1600여 개 가운데 3년 연속 100억 이상 흑자를 내는 곳은 10%도 채 안 된다. 더욱이 절반 정도는 언제 문 닫을지 모를 수년간 적자 상태다. 그럼에도 시가총액은 수천억, 수조 원으로 뻥튀기되니 오너든 투자자든 유혹을 느낀다. 자본은 성장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넘치면 타락의 절벽에 세우기도 한다. 신사업을 전개하고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는 헝그리 정신이 돈의 유혹에 퇴색되어 버렸다는 얘기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명제가 있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하고 성공을 꿈꾸는 벤처정신은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비단 IT 분야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며 바이오 AI 반도체칩과 같은 미래 산업에 수많은 벤처기업인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할 부분은 사회적 컨센서스다. 벤처정신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성공한 벤처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기득권 집단에 의해 벤처기업의 성공이 질투로 짓밟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벤처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토양이 척박해진다면 우리나라 미래 경제성장의 역동성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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