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혜화역에선 시혜를 권리로 이동시키는 중 [왜냐면]
한명희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기획실장
숨을 머금고,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 문 앞에 선다. 오늘도 승강장에서는 “특정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인해 해당 역에서 무정차할 수 있으니 양해 바란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여러분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입니다,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를 살고 싶습니다.”
오체투지 방식이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들이 온몸으로 기어가는 ‘포체투지’를 할 때,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지하철 열차 내 바닥으로 들어선다. 출근길 사람들의 신발 틈 사이를 비집고 머리를 내민다. “시민 여러분~.” 하자마자 시민들의 눈빛이 지하철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서늘하다. 포체투지가 없는 날에는 조용히 몇 사람이 종이 피켓 하나 들고 혜화역 승강장에 있지만 방송도 똑같고 지하철 직원들의 폭력도 똑같다.
장애인 ‘지하철 직접행동’의 역사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월22일, 설을 맞이하여 귀성한 장애인 노부부가 4호선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서울 지하철 262개 역사 중 엘리베이터 확보 역사는 36개(13.74%)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리프트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리프트의 구조 자체가 매우 위험해서다. 사방이 뚫린 리프트에 300~400㎏에 육박하는 휠체어와 장애인이 앉은 채 이동한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는 리프트는 수평이 맞지 않는 등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멈추는 경우가 잦아 이용자는 추락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참사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1년 뒤인 2002년 5호선 발산역에서 사고가 발생했고, 그 뒤로도 사망사고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15년이 지난 2017년 1·5호선 신길역에서도 리프트 추락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오이도역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장애인이 안정적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관계를 맺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곳곳을 누빌 수 있다는 뜻이다. 차별 없이 인간 활동의 기본을 보장하라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그러한 가치의 길을 만들어왔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에서 ‘대중’으로조차 분류되지 않은 양, 장애인들은 대중교통에 대한 접근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제정한 지 18년이 지났고, 이 법에 따라 정부는 2007년부터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5개년 계획’을 세워 시행하고 있지만, 저상버스 도입률은 10년 전 목표치(31.5%)에 이제 도달했을 뿐이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으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밤 12시가 지나면 장애인 콜택시와 같은 특별 교통수단의 운행이 중지되어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단 한대도 없는 지역이 존재하고, 휴일에는 감축 운행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지난 2021년 세계 장애인의 날인 12월3일을 맞아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시작한 전장연은 지금까지 지하철 승강장을 지켜냈다. 고립되지 않았던 것은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와 주고 있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도안전법을 앞세우며 전동 휠체어를 멋대로 조작하는 서울교통공사 직원들, 상부의 명령이라도 휠체어를 탄 사람의 몸을 팔로 겁박하도록 할 권한은 없다.
올해 서울시의 최중증장애인 노동자 4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서울특별시 장애인 탈시설 및 지역사회 정착지원에 관한 조례’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의 비준 국가임에도 폐지되었다. 서울시의 예산 논리 속에 장애인의 생존을 향한 외침은 누락되었다. 매일 쫓겨나도 장애인들이 지하철 직접행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서러움과 분노에 숨조차 막혀 말 한마디 내뱉기 어려워도 중증 장애인들은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혜화역으로 온다. 이렇게 ‘시혜’와 ‘동정’을 권리로 이동시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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