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미스터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9. 23. 18: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국제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사흘 간격으로 별세했다. 남재희와 박동선은 공통 분모가 거의 없는 인물들이지만 두 사람의 타계 소식에 ‘김형욱’이란 키워드가 떠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 전반부에 해당하는 1963∼1969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을 지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린 그 김형욱이다. 먼저 남재희는 김형욱의 권력이 절정에 달한 1960년대에 언론인으로서 그와 대면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정권 실세와 몇몇 일간지 정치부장들이 함께한 저녁 자리에 중정부장 김형욱과 조선일보 정치부장 남재희도 함께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두 사람 사이에 술 시합이 벌어졌다. 맥주 잔에 가득 따른 양주를 김형욱이 거침없이 한숨에 넘기자 남재희는 “술 마시는 모습을 보면 실력을 알 수 있는데 내가 졌다”며 한 발 물러섰다. 이에 김형욱은 “부전승을 거뒀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방송 화면 캡처
반면 박동선은 1970년대 들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김형욱과 관계가 있다. 1969년 중정부장에서 해임된 김형욱은 기대와 달리 핵심 요직에 기용되지 않았다. 1971년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구제를 받는 듯했으나, 이듬해인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의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며 의원 자리마저 잃었다. ‘박정희가 나를 완전히 버렸다’라고 여긴 김형욱은 보복을 피해 아예 해외로 탈출했다. 1973년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뒤 귀국을 거부한 채 눌러앉은 것이다. 1976년 10월 한국 정부가 재미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공무원들에게 거액을 제공하며 불법 로비를 했다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의혹 사건이 터졌다. 미국 정관계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전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인물로 단연 김형욱이 지목됐다. 김종필(JP) 등 박정희정부 실세들이 앞다퉈 회유에 나섰지만 김형욱은 박 대통령 등에 ‘비수’를 꽂기로 결심한다.

김형욱은 1977년 6월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을 맹비난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코리아게이트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활용해 대미 공작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을 향해 “당장 하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 의회 하원이 한·미 관계의 치부를 조사하겠다며 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선 유신 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온갖 비리 의혹을 진술했다. 핵심은 ‘박 대통령이 중정을 통해 자신의 정권에 유리하게끔 미국 사회 여론을 조종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김형욱은 개의치 않고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모략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심지어 중정부장 시절의 비밀스러운 경험담을 담은 책 집필에 나섰다. 이는 훗날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김형욱의 구술을 토대로 김경재(전 국회의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0·26 사건 이후 수사를 받는 도중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김형욱 실종 사건 당시 중정부장이 김재규였던 만큼 ‘김재규가 중정 요원들에게 김형욱 납치를 지시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005년 국가정보원의 자체 조사 결과도 그렇다. 하지만 일각에선 ‘박 대통령에 반감을 지녔던 김재규는 김형욱 제거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79년 10월7일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를 두고 ‘작성 중인 회고록 원고를 넘기면 거액을 줄 테니 파리에서 만나자’라는 중정의 제안에 김형욱이 속아넘어간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 듯하다. 김형욱의 운명과 관련해 중정 요원들에게 납치돼 프랑스 현지에서 죽음을 맞았으며, 시신은 발견이 불가능한 곳에 버려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반면 중정 요원의 감시 아래 한국에 들어와 끔찍한 고문을 받고 살해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형욱의 행방불명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이었으나 20일쯤 뒤 박 대통령이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지는 10·26 사건이 터지며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5년이 지난 1984년 10월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형욱에게 법적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오는 10월7일이면 김형욱 실종 45주년이 된다. 강산이 4번도 넘게 변할 시간이 흘렀으나 김형욱의 최후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