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성장 슈퍼스타' 될텐가…창조적 파괴로 'GDP 5000兆' 달성
제언 (1) 국민소득 7만弗 시대…지금보다 두배 더 잘사는 나라
GDP 21억弗서 1조8400억弗 850배 '스노볼'
1961년 무연탄·오징어 내다팔다 1985년 선박·석유제품 수출
정부주도로 年 10% 안팎 성장하며 10대 경제대국 올랐지만
20년 가까이 '저성장 늪' 허우적…2040년대엔 제로성장 위기
시스템 대전환으로 경제체질 구조 바꾸기에 올인해야
OECD 최하위권 노동생산성 제고, 新산업 규제 과감히 철폐
실질성장률 年2%서 4%로 올리면 GDP 2040년 3조5800억弗
각 시대는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을 넘어서는 전환기적 명칭이 있다.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와 흐름을 직관적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국 역사학 대가인 에릭 홉스봄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장기 19세기’로 규정하고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914)로 세분했다. 이후 1991년 소련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로 설정하고 대규모 전쟁과 갈등, 경제 발전을 수반한 사회 혁명으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로 정의했다.
스노볼처럼 성장한 한국 경제
1960년부터 두 세대 남짓에 걸쳐 이어진 대한민국 성장사는 ‘기적의 시대’로 칭할 만하다. 이 기간 한국은 눈을 굴릴수록 눈덩이가 커지는 ‘스노볼 효과’를 누리며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고속성장은 더 큰 고속성장을 불러와 국내총생산(GDP)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순식간에 배 수준으로 더블링(doubling)됐다. 1961년 21억달러에 불과하던 한국 GDP는 지난해 1조8400억달러로 850배 불어났고, 1인당 GNI도 85달러에서 3만6200달러로 425배 급증했다.
장기 19세기가 세 시대로 구분되듯 한국 성장사도 세 단계로 나뉜다. 1961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제1의 성장 단계다. 정부 주도 경제 정책과 수출 주도형 산업화에 성공한 시대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 조선, 철강, 기계산업 등이 빠르게 성장했다. 실질성장률이 연평균 8~10%에 달해 1985년 한국 GDP(1012억달러)는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1961년 철광석, 중석, 생사, 무연탄, 오징어 등이던 주요 수출 품목이 1985년 선박, 가구, 영상기기, 석유제품 등으로 탈바꿈한 것은 시대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제2의 성장 시대를 맞았다. 1985년 1012억달러이던 한국 GDP는 2005년 9715억달러로 1조달러에 바짝 다가섰고, 1인당 GNI가 2426달러에서 2만26달러로 열 배가량으로 늘었다. 국내 기업은 첨단 제조 분야로 영역을 넓혀 반도체, 전자, 자동차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다.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때이기도 하고, 외환위기로 금융·재벌개혁과 경쟁시장 조성이 강제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착화한 저성장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경제는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오르고 반도체, 2차전지, 자동차 등 미래 산업 분야 선두로 떠올랐지만 성장률이 급격히 둔화했다. 2000년대 들어 연 5% 수준으로 낮아진 실질성장률은 2010년대 3%대, 2020년대엔 2%대로 떨어졌다. 물가 상승을 고려한 명목성장률이 연 4~5%도 벅찬 상황이 되다 보니 1인당 GNI 2만달러를 넘은 지 20년 가까이 됐는데도 4만달러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성숙 단계에 들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많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급박하다. 중국 등 신흥국 제조업이 부상해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빠르게 약화하고 있는데 겹겹이 쌓인 규제 때문에 혁신적 사업 모델과 신성장 산업 출현이 지체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반도체 공급망 급변 등 대외적 요인도 문제다. 무엇보다 2021년부터 인구 감소 국면에 접어든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노동 공급 감소로 잠재성장률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연구기관들은 한국의 실질성장률이 2020년대 2% 안팎에서 2030년대 1%대 중반으로 하락하고 2040~2050년대 제로 성장을 하다가 2060년대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전망이 현실화하면 한국 GDP 순위가 2010년 10위에서 2030년 13위, 2050년 20위, 2070년 24위로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발등의 불이 된 생산성 제고
한국은 번영과 추락의 갈림길에 서 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다. 경제 주체 모두의 ‘창조적 파괴’와 시스템적 전환으로 경제 체질과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 생산성을 높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여성 및 장년층의 경제활동참여율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높여 노동 공급 감소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기술·경영을 혁신하고 노사관계와 법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 총요소생산성(TFP)과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노동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도 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지면 생산성을 고려한 노동 투입은 이론적으로 감소하지 않는다. 한반도 인구가 5000만 명을 유지하는 2040년까지 생산성 제고를 위한 구조개혁을 완성한다면 한국 경제의 전체 파이와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을 충분히 키울 수 있다.
낮은 생산성의 핵심 원인인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부터 끌어올리는 게 시급하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를 해소해야 중소기업에도 우수 인력이 들어간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계기업을 과감히 구조조정해 사업 재편을 유도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콘텐츠, 금융, 의료, 법률, 관광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은 진입 장벽과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 시장을 키우는 것도 절실하다. 홍콩을 탈출하는 글로벌 금융회사가 싱가포르로 몰려갈 뿐 한국에는 오지 않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비스 및 중소기업 생산성을 OECD 평균 수준으로만 올려도 잠재성장률을 30~40년간 연간 0.7~1%포인트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OECD 최하위권인 시간당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릴 노동시장 구조개혁도 필요하다. 해고와 고용 조건을 유연하게 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격차를 줄여야 기업이 쉽게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 자유롭게 혁신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신산업 관련 규제도 과감히 없애야 한다.
산업 구조 혁신은 필수 과제다. 기존 모든 산업에서 디지털화를 촉진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은 절감해야 하며 인공지능(AI), 바이오, 모빌리티, 반도체 등 신산업에서 성장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경영권 보호 장치를 강화하고 자본시장 규제를 완화하는 것도 긴요하다. 그래야 기업가정신이 샘 솟고 모험자본이 신성장 산업에 유입되며 그 성장 과실을 기업가와 투자자가 함께 나누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할 수 있다. 교육개혁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일하는 방식도 혁신하고 고도화해야 한다.
성장의 슈퍼스타로 돌아가자
광범위하고 동시다발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을 연 2%에서 4%로 끌어올린다면 한국 GDP는 2040년 3조5800억달러로 커진다. 현재 원·달러 환율로 4800조원쯤 된다. 연 2% 성장할 때(2조5800억달러)보다 1조달러 순증하는 규모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이 정도라면 GDP 절대 규모 글로벌 톱 7에 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40년 한국 인구가 5005만 명으로 예상되는 것을 고려하면 1인당 GDP도 7만달러를 넘는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인 나라 중 한국의 1인당 GNI는 지난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6위였다. 7만달러를 넘어서면 충분히 글로벌 톱5 수준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달성하기 쉬운 과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큰 미국과 독일도 성장률 4%대 경제로 재도약한 사례가 있다. 미국은 1980년대 후반 3%대, 1990년대 전반 2%대로 성장률이 낮아지다가 1990년대 후반 4%대 성장하는 경제로 탈바꿈했다. 정보기술(IT) 혁명과 관련된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이를 주도했다. 기업은 IT를 활용한 자동화로 효율성을 높였고 노동 단위당 생산량을 늘렸다. 테크, 플랫폼 등을 주축으로 한 IT 스타트업이 다수 등장해 고용 창출과 투자 선순환을 이끌었다. 앨런 그린스펀이 이끄는 미 중앙은행(Fed)이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하며 저금리 정책을 펼쳐 기업의 투자와 소비를 촉진했다.
독일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대 성장률로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가 2006~2011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 4%에 근접한 성장률을 보였다. 2003년 ‘아젠다 2010’을 발표한 이후 노동시장, 사회보장제도, 세제 및 교육 개혁을 추진한 결과다.
세계은행은 얼마 전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고소득 국가로 도약하지 못하고 성장이 정체되는 ‘중진국 함정’을 극복한 대표적 성공 사례로 한국을 지목했다. 한국 경제사는 높은 소득 수준을 이루려 하는 중소득 국가의 정책 입안자들이 꼭 배워야 할 필독서라며 한국을 ‘성장의 슈퍼스타’라고 평가했다.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터. 과거에 그랬듯 미래도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상열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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